[전문가 기고] 부통령 고어 '대선 징크스' 극복 관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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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앨 고어가 부통령으로 재직한 현 행정부는 미 역사상 최고의 경제호황을 이뤄냈다.

범죄는 줄었고 실업률은 사상 최저다.

내정은 평화롭고 발칸반도의 독재자는 제거된 듯하다.

미국은 무역자유화와 세계화에 새롭게 접근하고 있다.

또 한반도의 안정을 위한 새로운 채널을 찾는 것도 돕고 있다.

한마디로 미국은 번영과 평화를 누리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어에겐 한가지가 더 필요하다.

바로 과거 역사를 이겨내야 한다는 것이다.

미 대선은 외견상 연금보험과 의약처방전의 이점, 복지.교육.의료.총기규제 및 환경과 같은 국내 특정 이슈가 문제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런 이슈들이 선거에 결정적 요인이 될 것 같지 않다는 점이 이미 명확해졌다.

앨 고어와 조지 W 부시의 핵심 유권자들은 특정 이슈에 대해 분명한 견해가 있고 일찌감치 누구에게 투표할지 마음을 굳혔다. 따라서 부동표가 이번 선거를 결정지을 것이다.

이 경우 선거 이슈들은 유권자들에게 별로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고 대신 막연하지만 역사와 전통의 힘이 더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부시가 유리하다.

다음과 같은 사실을 살펴보자. 2백년이 훨씬 넘는 미 대선 역사에서 현직 부통령이 승리했던 경우는 단 세번이다. 20세기엔 부시 후보의 부친인 조지 부시 한명뿐이다. 1988년 조지 부시는 로널드 레이건 정권의 부통령으로 8년간 일한 뒤 대통령에 당선됐다.

물론 린든 B 존슨과 해리 트루먼이 존 F 케네디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서거로 부통령으로서 대통령직을 승계했고, 리처드 닉슨이 사임한 뒤 제럴드 포드가 후임 대통령이 됐다.

그러나 선거를 거친 건 아니었다. 간단히 말해 현직 부통령이 대통령에 당선되는 게 불리하다는 얘기다.

다른 역사적인 요인들을 살펴보자. 민주당의 루스벨트 대통령이 인기를 구가하던 1930년대와 40년대엔 공화당 대통령 후보는 유권자들로부터 전폭적이고 지속적인 지원을 받기 어려웠다.

하지만 민주당 트루먼 대통령이 48년 대선에서 박빙의 승리를 거두고 재출마하지 않기로 결정한 뒤 53년부터 61년까지 8년간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이끄는 공화당 정권시대였다.

민주당원인 케네디는 1960년 닉슨을 상대로 승리했지만 가까스로 이겼다. 케네디 후임자인 존슨이 이긴 것은 케네디 서거 이후 전국적인 애도와 민주당에 우호적인 분위기에 힘입었기 때문이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76년 민주당 후보인 지미 카터가 승리한 경우를 제외하곤 공화당은 20년간 대선 승리를 독점하다시피했다.

68년 당선된 닉슨은 72년 상대 후보인 맥거번을 압도적 표차로 눌러 재선됐고 이후 81년부터 93년까지 12년간 레이건과 부시 대통령 시대가 열렸다.

48년 이후 민주당이 백악관에 입성한 것은 세가지 경우일 때다. 즉 선거가 박빙(48년 트루먼과 60년 케네디의 경우)이었거나 내정이 위기(케네디 서거 이후 존슨의 당선이나 워터게이트 스캔들로 인한 카터 당선)일 때, 또는 투표율이 50% 미만인 경우(92, 96년 승리한 클린턴은 유효 투표 중 50% 미만의 지지를 얻음)였다.

흥미롭게도 68년 이후 지난 여덟번의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가 유효 투표의 50% 이상을 얻은 경우는 76년 단 한차례였다.

민주당 후보 당선에 도움이 됐던 앞서 열거한 요인들 중 두가지(스캔들과 제3당 후보의 약진)가 이번에도 앨 고어 후보에게 실제로 작용할지 모른다. 클린턴 대통령의 사적인 스캔들이 고어 선거에 불리하게 작용했음은 명백하다.

게다가 제3 후보인 환경론자 랠프 네이더가 이번 투표에서 3~4% 정도의 득표력을 보인다면 이는 고어의 전통적인 지지기반을 깎아먹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지난 50년간의 대선 역사는 민주당 후보가 백악관에 입성하기 위해 유권자들의 확고하고 전폭적인 지지를 얻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강하게 보여준다.

이같은 역사적 기록은 명백하지만 왜 그런 결과가 나타났는지, 또 그런 결과가 미국인들 사고방식에 실제로 어떻게 작용했는지는 뚜렷하지 않다.

혹자는 냉전기간 중 미국인들이 안보와 외교정책에서 억센 이미지를 갖고 있는 공화당 후보를 선호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또 다른 이들은 미국인들이 지역 및 사회, 즉 '먹고 사는' 이슈와 관련해선 민주당 후보의 의회진출을 선호하지만(의회는 지난 50년간 거의 민주당이 장악) 국내의 폭넓은 문제들을 관장하는 대통령직에 진보적인 민주당 후보를 뽑는 것을 꺼리고 있기 때문으로 본다. 미국인들은 한 당이 너무 오래 대통령직을 맡는 걸 원하지 않는다는 평가도 있다.

이유가 무엇이든간에 고어는 이러한 역사적 현실과 맞서 싸워야 한다. 그는 부시보다 폭넓은 경험을 갖고 있고 보다 냉철한 정책 입안자일지 모르지만 역사적 사례를 보면 그는 불리하다.

과거를 기초로 살펴보면 고어의 능력은 선거일에 중요 요인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만일 고어가 대통령으로 당선된다면 그는 이제까지의 역사적인 불리함을 이겨냈노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베이츠 길 박사 (브루킹스연구소 동북아센터 소장)

정리=유권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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