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치문의 정치 手읽기] 허리 낮춰야 판세 보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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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국민의 정부와 '개혁' 은 근 3년 동안 팽팽하고도 줄기찬 승부를 펼쳐왔다. IMF사태 초반전은 정부가 대세를 장악한 듯 보였다.

그러나 이후 지지부진하고 소강상태가 계속되더니 정현준 게이트로 정부는 치명적 상처를 받고 대패의 위기에 직면했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에 대한 열렬한 지지자들조차 개혁의 전위대인 금감원의 비리에 이르러서는 비애감에 젖게 된 것이다.

방심.상심.과신.과욕.분노.짜증.핑계.두려움은 승부의 적들이다. 개혁 주체들의 마음속에 스며들어 평정을 해치고 집중력을 떨어뜨려 오판을 낳게한 것은 과연 무엇일까.

1996년 벽두에 세계 바둑계엔 특이한 승부가 시작됐다.

국제대회를 휩쓸어 랭킹 1위에 오른 중국인 마샤오춘(馬曉春)9단, 그리고 한국인 이창호 9단. 두 사람의 절정고수가 피할 수 없는 대결을 시작한 것이다.

마샤오춘은 내용도 훌륭하고 유리한 때가 더 많았으나 번번이 역전패를 당했다. 실력이 비슷하니까 기술의 승부는 아니고 마음의 승부였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이런 결론이 내려졌다.

"이창호는 언제나 그대로였다. 마샤오춘은 스스로 조금 높아졌는데 그것이 패인이 됐다." 이창호의 일상, 그의 사고는 변한 게 없었다.

마샤오춘 역시 오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단지 세계챔피언에 합당한 대우를 받고싶어 했을 뿐인데 의외로 거기에 패배의 그림자가 스며들게 된 것이다.

마음이 높아지면 앞만 보고 걷게 된다. 사소한 의전에서조차 노여움을 타는 등 화낼 일이 전보다 많아진다. 세상에선 이런 경우를 "변했다" 고 표현한다.

승부에서 이같은 노여움.불쾌감은 마음을 소모시켜 방심을 유발하고 집중력을 떨어뜨리는 독약이 된다.

정부가 벌여온 개혁과의 한판승부에서도 혹시 이 '높이' 가 패인은 아니었을까. 개혁의 주체들이 권력의 단물에 젖어 '변한' 것은 아니었을까.

만약에 권력을 잡기 전 불공정에 가슴 아파하고 부패에 상심하던 그때의 초심(初心)을 잊지 않았다면, 금감원의 비극은 일어날리 만무하다.

마샤오춘은 뛰어난 실력을 갖췄음에도 고개가 높았던 탓에 이창호에게 10연패라는 치욕을 당했다.

허리를 낮춘 이창호는 난마(亂麻)처럼 얽힌 불리한 판세일수록 사막을 걷듯 정수를 추구하는 초인적인 인내력을 보였다. 한낱 바둑 한판에서도 승리란 이렇듯 피를 말리는 고통의 산물인데 개혁이란 대역사야 오죽할까.

때가 늦었지만 아주 늦은 것은 아니라고 한다. 우선 金대통령이 구름 위에서 평지로 좀더 확실히 내려와주기를 이구동성으로 바라고 있다.

많은 인사들이 미망(迷妄)에 잠겨 있지만 金대통령이 그들의 혼을 두들겨 깨워 개혁이란 강적과 흙탕물도 마다않는 정면대결을 펼칠 경우 승리의 희망은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이다.

박치문 <중앙일보 바둑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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