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늉만 낸 사외이사제도 개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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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호 30면

은행권 사외이사 모범 규준이 25일 발표됐다. 은행연합회를 중심으로 사원은행 간 자율 결의 형식을 빌린 것이지만 금융 당국의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지금의 이사회제도는 1997년 말 외환위기 이후 도입됐다. 짧은 연혁에다 우리에게 생소한 영미식 제도를 받아들였으니 정착에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금융 당국의 적극적 개입이 당위성을 가지는 대목이다. 사실 이번 개편안 마련의 배경이 KB금융 사태의 봉합 수순이든, 사외이사 물갈이를 통해 금융 당국이 잇속을 챙긴다는 음모론이든 무슨 상관이 있으랴.

김우진의 캐나다 통신

이번 모범 규준은 주요 20개국(G20)이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등에서 진행 중인 국제적 논의와 연계돼 있다는 금융 당국의 주장을 보도로 접하면서 그동안 기업지배구조에 관심이 많았던 필자는 내심 기대했다. 지금의 이사회는 사외이사 중심으로 이뤄져 있다. 따라서 사외이사제도의 개선은 이사회제도, 나아가 기업지배구조의 근간을 손대는 작업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뚜껑을 열고 보니 실망 그 자체였다.

무얼 고쳤는지 한번 보자. 주로 사외이사의 임기 제한 및 자격 요건 강화, 최고경영자(CEO)와 이사회 의장의 원칙적 분리 등 이사회 운영의 전반적 개선을 포함하고 있다. 지난 10년 동안 수시로 도마에 올랐던 단골 메뉴다. 모범 규준에 대한 은행권의 반응이 냉소적인 이유가 짐작이 간다. 이 정도의 답안으로는 크게 변할 게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새로운 안이라 이름 붙이기 민망할 정도로 구식이다.

조목조목 더 들여다보자. 사외이사의 최초 임기를 2년으로 보장하되 최대 연임 기간을 5년으로 제한했다. 현재 대부분 1년으로 돼 있는 사외이사 임기를 2년으로 늘림으로써 사외이사의 독립성을 제고하는 한편 사외이사의 집단 권력화와 경영진 유착을 방지하기 위해 최대 임기를 5년으로 제한한다는 친절한 설명까지 덧붙인다. 그러나 이를 통해 경영진과의 밀월 관계가 끊어질 수 있다고 믿는다면 분명 하수다. 게다가 CEO 임기는 3년이면서 사외이사 임기는 2년으로 하는 논리적 근거도 알 수 없다.

CEO와 이사회 의장의 분리나 이사의 자격 요건 강화는 이사 풀(pool)이 부족한 우리나라 현실에 부적합하다. 게다가 사외이사의 보상 수준을 하향 평준화시키는 발상은 납득하기 어렵다. 이런 식으로 가다간 제대로 된 인사를 사외이사로 영입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 이들에게 보상 수준은 자존심이기 때문이다. 사외이사에 대해 상호평가와 다면평가를 하도록 돼 있는데 그렇게 한들 제대로 된 결과가 나오겠는가. 한마디로 실효성이 없다.

이런저런 자료를 찾다 보니 과거 임원들에게 지급했던 스톡옵션을 올해 부활시킬지에 대해 경영진이 감독 당국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기사가 눈에 띈다. 경영진 보상은 이사회의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언급은 아예 없다. 이게 우리의 현실이다. 아무도 이사를 이사로 생각하지 않는 상황에서 임기를 제한한다고, 이사회 의장을 분리한다고 변화가 일어나겠는가.

이사회는 경영전략의 결정, 리스크 관리를 통한 건전경영의 유도, 경영진 선임과 보상 등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정관에 명시돼 있는 이사회의 역할이 사문화되지 않고 실제 구현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결국 어떤 사람을 사외이사로 영입하느냐가 성공적인 이사회의 관건이다. 자신의 이름을 걸고 의사 결정을 하며, 이사회 활동에 충분한 시간을 투자할 의지가 있는 사람을 뽑아야 한다. 한마디로 일하는 이사회(working board)를 만들어야 한다.

국민은행은 한국기업지배구조센터로부터 2008년 기업지배구조 우수 기업으로 선정됐다. 그런데 1년이 지난 지금은 소용돌이의 한가운데 서 있는 신세로 전락했다. 그동안 잘나가던 글로벌 금융회사들도 지배구조 문제로 휘청거리고 있다. 이번 기회에 과연 우리한테 영미식 지배구조가 맞는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야 하는 건지 진지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은행과 같이 보수적 문화와 시스템이 갖춰진 금융회사에서 CEO의 역할은 제한적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제왕적 권한을 은행장에게 부여했다면 조정의 미학이 요구될지도 모른다. 모니터링 시스템을 강화한다는 차원에서 새로운 지배구조 문화를 만드는 것도 고려할 수 있다. 사외이사들이 정말 못 미덥다면 이사회에 금융 당국이 직접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감독이사회(supervisory board)와 경영이사회(management board)가 모두 있는 독일식 이사회제도가 벤치마킹 대상이다.

기업지배구조는 그 회사의 경쟁력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무형자산(intangible asset)의 핵심이다. 이것을 대충하려다 망하는 회사가 부지기수다. 제대로 된 논의가 지금이라도 있어야 한다. 공청회 한 번 없이, 전문가 의견을 제대로 수렴하지 않고 일사천리로 추진하는 것은 서둘러 문제를 봉합하려는 의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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