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미군 감축협상 뒷얘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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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올해 6000명, 내년에 6500명을 빼겠다. 더 이상 협상은 없다(미국)" "받아들일 수 없다. 내년엔 700명만 감축하라(한국)."

주한미군의 감축 시한 연장을 놓고 한.미 당국은 3개월간 끈질기게 숫자 싸움을 벌였다. 내년에 3000명을 감축하겠다는 최종 타협안(9월 22일)이 나오기까지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지난 6월 6일 미국이 공식적으로 한국에 통보한 감축 숫자는 1만2500명, 감축 완료 시한은 2005년 말이었다. 한국 정부로선 충격이었다. 정부 계산에 따르면 우리가 2005년에 감당할 수 있는 감축 미군의 한계는 700명이었다.

빠져나가는 미군은 전투부대→10대 군사임무 전환부대→지원부대 순으로 돼 있다. 중요성이 큰 순서대로 감축된다. 따라서 내년에 감축되는 미군과 관련 군 장비에 대해선 즉각적으로 한국군 전력이 보충돼야 한다. 그런데 자주국방을 위해 내년에 추가로 편성할 수 있는 예산엔 한계가 있다. 또 정부는 미국 대선 결과의 불투명성과 이에 따른 북핵 6자회담의 유동성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 정치환경의 변화에 따라 감축계획 자체가 무산될 수도 있는 만큼 내년에 빠져나가는 미군의 수를 최소한으로 만들어 놔야 복원이 가능하다는 계산이 없을 수 없었다.

이래서 나온 정부의 첫 응수가 '균등 감축안' 논리였다. "올핸 너무 많은 미군이 빠져나가므로 5000명으로 줄이고, 내년엔 무조건 700명으로 묶자. 대신 나머지 6800명은 2006년부터 2008년까지 단계적으로 균등하게 감축하라"는 것이다. 한미연합사 출신의 전.현직 미군 장성들과 미 국방부 안의 한국통들에게 부탁해 미국 정부를 설득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자 미국 측은 8월 20일 열린 11차 미래 한.미동맹 정책구상회의(FOTA) 직후 새로운 제안을 했다. 올해와 내년에 5000명씩 감축하겠다는 것이었다. <본지 9월 22일자 1면>

감축의 최종완료 시한이 자연스럽게 2008년으로 인정된 게 성과였다.

그 과정에서 미국의 리처드 롤리스 국방부 부차관보 등은 우리 측 실무진에게 전화를 걸어 "한국이 걱정하는 다연장포(MLRS)는 남겨놓겠다"는 '당근'을 제시하기도 했다.

정부는 기왕의 균등 감축안의 논리를 발전시켰다. "미국이 해외주둔 미군 재배치계획(GPR)에 따라 주한미군을 감축하겠다는 입장의 '합리성'을 이해한다. 그러나 우리로선 안보가 위협받게 되는 '절박한' 상황이 된다. 이 점을 미국에 이해시켜라."

하지만 미국 측은 "내년 감축 숫자를 5000명 이하로 줄일 수 없다는 것은 (도널드 럼즈펠드)장관의 뜻"이라고 마지노선임을 밝혔다. 피 말리는 숫자 협상이 진행되면서 우리 정부는 지난달 16일 방한했던 롤리스 차관보가 돌아간 직후 '절박성'을 호소한 마지막 양보안을 미측에 제시했다. 내년의 감군 숫자를 700명에서 2000명까지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며칠 후 정부 당국자는 리언 러포트 주한미군사령관을 찾아가 "미군 감축으로 인한 한국 국민의 안보 불안감을 미 국방부 수뇌부에게 직접 설명해달라"고 요청했다. 러포트 사령관은 "노력은 하겠지만 (럼즈펠드)장관의 입장은 워낙 확고하다"며 난색을 표명했다고 한다.

미국의 최종안은 12차 FOTA 마지막날 저녁때 나왔다. 9월 22일이었다. 공식 회의가 끝날 무렵 미군 고위 관계자는 회의 석상이 아닌 자리에서 우리 측 관계자에게 "내년 감군 숫자는 3000명이다. 이 정도면 됐지 않으냐"고 귀띔해줬다.

이런 귀띔이 공식 문서로 우리 정부에 전달되기까진 13일이 걸렸다. 그래서 지난 6일 '올해 5000여명을 감축하고, 내년 3000여명, 나머지 4500여명은 2008년까지 단계적으로 감축한다'는 양국의 공식 발표가 나올 수 있었다.

박신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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