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집 풍경] 서울 노량진 여수식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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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할머니의 손은 묘하다. 어린 손주의 아픈 배를 만질 때는 약손이 됐다가 음식을 만들 때는 꿀손이 된다.

똑같은 재료로 만든 음식도 할머니 손이 지나가면 달콤하고 감칠 맛이 더해진다. 부드러운 엄마의 손도, 거친 할머니 손의 맛내기에는 상대가 안된다.

서울 노량진 수산시장 맞은편 청탑학원 골목길을 찾아 들어가면 잠시 잊었던 '할머니의 손맛' 을 만날 수 있는 식당이 있다.

살림집에 '여수식당(02-813-1952)' 이란 간판만 내건 곳인데 서울에선 제대로 맛보기 어려운 홍어 횟집이다.

메뉴판도 없는 방안에 앉아 음식을 준비하며 분주하게 움직이는 주인 할머니의 모습을 보면 고향집에 온 듯한 기분이 든다.

30여년간 홍어요리만 해온 할머니의 손을 거쳐 나온 홍어 한점을 초고추장에 찍어 입에 넣으면 톡 쏘는 맛에 정신이 번쩍 난다. 씹으면 씹을수록 잘 삭은 맛에 깊이 매료되고 만다.

역한 냄새라곤 전혀 느낄 수 없을 정도. 대천산 홍어를 닷새 동안 외부 공기가 들어가지 않도록 삭힌 게 역한 냄새를 없앤 비결이라고 주인 할머니는 귀띔한다. 곁들이는 동동주도 연하고 부드럽게 목젖을 타고 넘어간다.

홍어회에 따라 나오는 밑반찬도 걸작이 많다. 대표적인 것이 돌산 갓김치와 굴무침. 둘 다 더운 밥에 얹어 먹으면 숟가락질에 가속도가 붙는다.

특히 추자도 멸치젓으로 담갔다는 갓김치는 아삭아삭 연하면서도 쌉쌀한 맛이 일품이다. 그 맛을 못잊어 손님들이 따로 구입해 갈 정도로 인기. 게장도 짭짤한 맛이 입맛을 돋우는데 그만이다.

할머니가 손수 쑨 도토리묵도 더 달라고 아우성치는 손님이 많다. 손님이 오면 항상 새로 지어내는 밥에는 그만 밥도둑이 되고만다.

메뉴판이 없어 어리둥절하지만 취급하는 음식은 홍어회.홍어찜.갈치조림 세가지뿐. 값은 6만원씩으로 서너명이 먹기에 적당하다. 동동주는 한 주전자에 6천원. 밥값은 따로 6천원씩 받는다. 네명이 홍어회 한 접시에 동동주를 곁들이고 밥을 먹었다면 9만원이 든다.

방 세개, 밥상이 여덟개밖에 없어 예약해야 헛걸음을 안한다.

영업시간은 오전 11시30분~오후 11시, 일요일이나 휴일엔 쉬는데 예약이 있으면 예약 손님만 받는다. 주차장을 기대하는 건 무리.

유지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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