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한·일 해저터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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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영국과 프랑스를 해저터널로 연결한다는 발상은 프랑스 쪽에서 먼저 나왔다.

프랑스 북부도시 아미앵의 아카데미는 1750년 영.불해협을 관통하는 고정 구조물 설치에 관한 아이디어를 공쿠르에 부쳤고 지질학자였던 니콜라 데마레가 제안한 해저터널 굴착안이 수상작으로 뽑혔다.

하지만 실현 가능성과는 거리가 먼 공상수준이었다. 그런 점에서 프랑스 광산기사였던 알베르 마티유는 영.불 해저터널의 진정한 선구자라 할 만하다.

1802년 그는 위 아래로 두개의 터널을 뚫어 위로 마차길을 깔고 아래는 배수용 터널로 이용하는 방안을 제시하며 상세한 설계도까지 그렸다. 해군대국 영국을 제압하지 못해 안달이던 나폴레옹 1세도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터널 굴착 방식 외에도 철제 튜브 가설, 교량 건설 등 각종 아이디어가 속출했지만 가장 큰 장애는 영국 정계와 군부의 부정적 태도였다.

19세기 중반 영국 총리였던 파머스톤은 "지금도 두나라 거리가 너무 가까워 문제인데 더 줄이자는 얘기냐" 며 반대했고 가닛 월슬리 장군은 노골적으로 대륙의 침략 위험 증대 가능성을 내세우며 반대여론을 주도했다.

안보적 고려와 외교적 고립주의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영국 국방부가 군사적 근거에서 영.불 해저터널 건설에 더 이상 반대하지 않는다고 공식 천명한 것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도 한참 뒤인 1955년이었다.

지난주 서울에서 열린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에서 모리 요시로(森喜朗)일본총리가 한.일 해저터널 건설을 제안해 관심을 끌고 있다.

규슈(九州)와 쓰시마(對馬)섬, 부산을 연결하는 1백80㎞의 터널을 뚫어 한반도와 시베리아, 유럽까지 철도를 연결한다는 구상이다.

경의선 복원공사로 부풀어 오른 '철(鐵)의 실크로드' 의 꿈을 일본까지 확대하고 싶다는 얘기로 들린다.

일본은 94년 개통된 영.불 해저터널(50.5㎞)보다 6년이나 앞서 혼슈(本州)와 홋카이도(北海道)를 잇는 세계 최장의 세이칸(靑函)해저터널(53.9㎞)을 건설한 기술력을 갖고 있다.

일본이 공사비의 대부분을 댄다면 한.일 해저터널이라고 불가능한 꿈은 아니다. 대륙 진출은 일본의 역사적 숙원이다.

경부선과 경의선도 그래서 건설됐다. 안보상으로 대한해협이 갖는 의미는 크다. 경제적 측면만 고려해 섣불리 결정할 문제는 아니다. 영.불 해저터널도 첫 구상에서 실현까지는 2백44년이 걸렸다.

배명복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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