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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을, 정들고 싶어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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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그의 미소는 자꾸 다가가고 싶게 마음을 끌었다. 한동안 선량한 미소에 대해 생각했고, 그녀는 끌려가고 싶었다. 결국 끌려가다 말았다. 더 이상 마음을 쓰면 안 되었다. 그에게 임자가 있기 때문이다. 괜찮은 남자는 이렇게 다 임자가 있다. 그러면 임자가 없으면 괜찮은 남자가 아닌가. 그건 아니다. 벌써 노안이 된 건 아닌데…. 그녀처럼 싱글인 여자들은 괜찮은 남자들이 잘 안 보인다고들 한다. 글쎄 바람 불고 낙엽이 뚝뚝 떨어지면 괜찮은 사내들이 보일는지 모른다. 추우면 가슴에 안경알만한 구멍이 뚫려 더운 밥, 찬 밥 가릴 때가 아님을 깨달을 테니까. 가을…. 사람들이 그리운 계절이긴 하다. 연애든 우정이든.

사는 건 힘들지만 사람 간의 정이 있어야 견딜 힘이 생긴다. 얼마 전 나는 첫 사진전을 마치면서 행복했다. 오신 손님, 도와준 사람이 많아서였다. 전쟁 같은 전시를 치르다 보니 아쉬운 소리나 신세를 지기 참 싫어하던 나도 돕는 손길을 뜨겁게 잡기도 했고, 힘들게 준비했으니 와달라고 두번 이상 e-메일과 전화를 올리기도 했다. 예전의 낯가림이 심한 나로선 생각하지 못할 일이었다. 물론 이러기까지 엄청난 노력이 있었다. 낯가림이 심해봤자 외로움밖에 남는 게 없고, 무조건 사람들과 있을 땐 기쁘고 행복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집이 줄어들면 사랑이 늘어난다는데, 나도 그런 것 같다. 나이 먹는다는 것 자체가 성격면에서 둥글어지고 무던해지는 일이 아닐까 한다.

언젠가 본 책 '마음의 속도를 늦추어라'에서 "현대적인 생활방식에서 우리가 신경써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는 인간적인 친밀한 접촉과 관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란 구절이 가슴에 찡하게 남았다.

요즘 사회는 이런 관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시간과 기회가 참 부족하기 때문이다. 지인들끼리 연락이 뜸해지면 까마득히 그 사람을 잊고 말아서 가끔 그 망각과 상실감이 슬프다. 이번에 초대하지 못한 사람도 많아 미안하다.

아무튼 생일 등 온갖 인생의 특별한 날의 큰 의미는 그날을 핑계로 소박한 식사와 차를 나누는 기쁨에 있다고 본다. 누구나 사람들과의 친밀하고 따뜻한 관계가 필요하다. 남의 얘기를 많이 들어주고, 유머 있고 환한 분위기가 되면 사람들은 서로 조금씩 친해진다. 그리고 함께 있는 순간에 행복하지 않으면 언제 행복할 것인가. 그러잖아도 불황에다 갑갑한 정치.경제 등 풀리지 않는 일로 우울할 때가 많은데.

언젠가 후배가 해준 말 한 마디. 깊이 와닿았다. 어느 신부님이 하신 얘기였다."집은 많으나 정작 살 집은 없어지고, 먹거리는 많은데 정작 먹을 게 마땅치 않고, 정보는 많아졌는데 정작 알아야 할 철학은 없어졌다. 빵만으론 살 수 없다는 말도 빵만으로 살 수 있다고 변했다. 철학이 있어야 제대로 된 인간적인 삶을 살 수 있는데 말이다."

세상엔 온갖 물건이 넘치는데 정작 사람 간의 정은 메마르고, 일로 보내는 시간은 많은데 정든 사람과 보낼 시간이 없다. 따뜻한 온정이 깃든 사회가 되려면 우선 자신부터 아집을 버리고 사랑이 많은 사람이 돼야 가능하다.

삶은 부단한 자기 갱신의 나날이다. 자기 노력 여하에 따라 아주 좋은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기 때문에 나 자신도 한계를 짓지 않는다. 불안해하면 불안에 실려 그렇게 되고 만다. 그만큼 의연하고 담대한 마음을 갖지 않으면 살기 힘든 세상이기도 하다. 내가 마음먹기에 따라 환경이 변하고 삶이 달라진다. 다정도 병인 양 하여 설사 아프고 고단하더라도 이 가을과 지인들과 깊이 정들어 보리라. 2004년의 가을은 다시 돌아오지 않으므로.

신현림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