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EU, 대북수교 갈등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서울에서 열린 아시아.유럽 정상회의(ASEM)에 참석한 유럽연합(EU) 국가들이 대북(對北) 수교를 둘러싸고 갈등을 빚고 있다.

특히 EU의장국인 프랑스의 자크 시라크 대통령은 영국과 독일이 서울에서 잇따라 대북 수교 방침을 발표한 데 대해 20일과 21일 직.간접으로 불만을 표시했다.

프랑스 언론에 따르면 시라크 대통령은 영국과 독일이 북한과의 수교를 발표한다는 사실을 사전에 통보받지 못했다.

시라크 대통령은 지난 19일 청와대를 방문,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대북정책에 대한 EU의 지지를 표명하고 "유럽 국가들도 북한과 정치적 대화를 강화할 수 있길 바란다" 고 말한 직후 주한 프랑스 대사의 메모를 통해 영국의 결정을 전해 들었다는 것이다.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도 일방적으로 북한과의 외교관계 수립 계획을 발표해 버렸다.

이에 대해 프랑스 언론들은 "시라크가 작은 수모를 당했다" 고 보도했다.

ASEM 회의를 통해 EU의 통일된 정책 의지를 보여주려던 시라크의 구상이 완전히 깨졌다는 것이다.

게다가 프랑스와 영국.독일은 다음달 북한에 공동 사절단을 보낼 계획도 잡아놓았었다. 따라서 시라크는 영국과 독일이 대북 공동보조를 취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가 허를 찔린 셈이다.

영국과 독일의 전격적인 대북 수교 발표가 나온 뒤 프랑스 외무부와 대통령 관저인 엘리제궁엔 초비상이 걸렸다고 현지 언론들은 보도했다.

외무부 담당자들이 EU 회원국 정부에 전부 전화를 걸어 또다른 '깜짝쇼' 가 없는지를 확인했다는 것이다.

시라크 대통령은 21일 ASEM폐막 기자회견에서 북한과의 수교에 대해 "북한 인권과 핵미사일 문제의 진전에 따라 달라질 것" 이라며 영국과 독일을 간접적으로 비난했다.

시라크는 "북한은 명백한 독재국가" 라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그는 "김대중 대통령의 평화.화해 정책을 지지하며 프랑스도 북한과 협상을 시작했다" 고 말했다.

벨기에 외무부도 "EU 회원국과 북한의 수교 문제는 의장국인 프랑스가 주도해 추진할 일" 이라며 독일과 영국 정부를 비판했다.

21일 오전 ASEM센터에서 열린 슈뢰더 총리의 기자 회견 때는 "북한과의 외교정상화 방침에 대해 EU의장국인 프랑스와 사전 협의를 했나" "시라크 대통령과 어느 정도 불화를 겪고 있는가" 등의 질문이 쏟아졌다.

이에 대해 슈뢰더 총리는 "이미 6개 유럽 국가가 북한과 외교 정상화를 추진하고 있다.

우리는 정상적인 과정을 통해 이 문제를 검토, 발표했다" 며 "EU 내에 불협화음은 없다" 고 주장했다.

로빈 쿡 영국 외무장관도 프랑스의 반발을 의식한 듯 "북한과의 외교관계 수립이 북한체제를 지지하는 게 아니라 현실적 상황을 인정하는 것" 이라고 말했다.

독일과 영국의 갑작스런 대북 수교는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의 북한 방문 등 미국의 대북정책 변화에 자극받은 결과로 보인다.

파리〓이훈범 특파원, 이상언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