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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중 변계조약 문서 발견하기까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7면

중앙일보 주관의 국경탐사를 떠나기 전 국경관계 자료들을 조사하면서 한가지 큰 의문을 갖게 됐다.

국내 어디에도 북한과 중국간의 국경문제를 구체적으로 기술한 곳이 없으며, 무엇보다 조약문 자체를 구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우리 헌법 3조에는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 라고 규정돼 있음에도 그 한반도의 실지(實地)에 대한 규정을 확보하지 못한 셈이다.

그토록 의아스러웠던 북한과 중국의 변계조약을 옌지(延吉)시의 헌책방에서 구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곳에서 우연히 국경자료집을 집어 펼치는 순간 온몸이 굳어지는 긴장감을 느꼈다. 헐값 15위안(약 1천3백원)을 지불하고 부랴부랴 책방을 나섰다. 찬찬히 눈을 비비고 들여다보니 국내 어디에서도 구할 수 없는 북한과 중국의 변계조약이었다.

지린(吉林)성혁명위원회에서 '기밀문건.주의보존' 이라는 주의를 달아 1974년에 간행하였다. 공포되지 않은 문건이므로 잘 보관하라는 안내와 함께 북한과 중국간의 국경조약 문서들이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우리는 백두산(白頭山)과 천지(天池)를 민족의 성지인 영산(靈山)으로 믿고 귀중히 생각해 오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관심이 고조된 것은 근세의 일이다. 우선은 청나라에 의해 정계비가 세워지면서 조야(朝野)에 백두산에 대한 관심이 일었다.

1712년에 '서쪽으로는 압록강 동쪽으로는 토문강(西爲鴨綠東爲土門)' 이라 기록한 비석을 그 두 강의 분수령이라고 여겨지는 백두산 남쪽 기슭에 세운 것이다.

1백70여 년 후인 19세기 말 두만강유역의 거류민 문제 등으로 청나라와 토문(土門)감계(勘界)문제를 논의한 적이 있다.

이때 우리는 토문강은 송화강 상류의 토문강을 가르킨다고 주장했다. 청나라는 토문이 두만강을 말하기 때문에 오히려 그 수원의 하나인 홍단수(紅丹水.조약에서는 홍토수)를 국경으로 주장하면서 정계비의 위치보다 더 남쪽으로 국경을 끌어내리려고 했다.

이 때에 우리측은 토문강은 송화강의 지류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간도영유권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계기를 얻었다.

그후 간도지방으로 이주민이 늘어나고 또 독립운동의 거점이 그곳에 확보되면서 백두산 두만강 일대의 국경문제가 우리의 큰 관심사가 된 것이다.

하지만 일제(日帝)는 토문을 두만강으로 간주하는 간도 협약을 강요했고 간도에 대한 영유권 논의는 이로부터 중단되었다.

따라서 오늘날 한반도라고 여기는 국토는 이 조약에 의거해 비로소 처음으로 그 실체가 정해진 것이다.

백두산과 천지의 절반 이상이 우리 민족의 영토가 된 것은 이 조중변계조약이 처음이다. 우리민족이 갖는 최초의 국경조약문인 셈이다. 그 결과 정계비 건립 당시보다 우리는 더 많은 부분을 확보하게 됐다.

울릉도에 사람이 거주하는 것을 금하는 공도(空島)정책이 1880년까지 계속되었던 데서 알 수 있듯이 19세기까지도 국토 개념은 오늘날처럼 첨예하지도 적극적이지도 않았다.

만일 우리나라가 조선중기, 적어도 러시아의 동진시기 경에 적극적인 영토확장 의식을 지녔다면 지금과는 다른 국토를 소유하였을지 모른다.

안병욱 교수 <가톨릭대.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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