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러시아의 '무례'만 탓할 일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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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러시아를 방문한 이한동(李漢東)총리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온 것은 경위를 떠나 우리로선 불쾌한 노릇이다. 정상적인 외교관행에서는 흔치 않은 일이다.

지난 6월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모스크바에 갔던 반기문(潘基文)외교부차관도 그랬고, 바로 이어 러시아를 방문한 이정빈(李廷彬)외교부장관도 푸틴을 못 만나고 돌아왔다.

공식방문한 외교장관을 그 나라 정상이 만나주는 것은 외교의전의 ABC에 속한다. 푸틴 대통령의 연내 방한은 본인이 직접 김대중(金大中)대통령에게 약속한 사안이다.

그래서 양국 실무진 사이에 협의까지 오갔지만 러시아측 사정상 연내 방한은 도저히 어려운 쪽으로 결론이 난 모양이다.

외교적 상궤(常軌)를 벗어난 '의도적 무례함' 이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한.러 수교가 올해로 10주년이다.

그럼에도 양국관계가 아직 미흡한 수준에 머물고 있는 데는 분명 러시아가 서운하게 여길 만한 구석이 있었고, 그 점은 우리쪽도 반성할 대목이라고 우리는 이미 지적한 바 있다.

그렇다고 마치 분풀이라도 하듯 외교적 결례를 거듭하는 것은 온당한 처사로 보기 어렵다. 그럴수록 예의를 지키면서 따질 것은 따지는 것이 대국다운 금도(襟度)라 할 것이다.

정부로서도 대(對)러시아 외교의 어려운 현실만 탓할 것이 아니라 러시아측의 '무례' 를 자초한 측면은 없는지 냉정히 따져봐야 한다.

그 어느 때보다 4강외교가 중요한 시점이다. 남북간 화해.협력의 급물살 속에 북.미관계가 급진전하고 있고, '조.러 신조약' 체결로 북.러관계는 이미 새 국면에 접어들었다.

북.미관계 진전에 따라 북.일관계도 급진전 가능성이 크다. 이런 상황에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방북 합의 사실을 한국 외교부가 사전에 몰랐다는 설은 사실이 아니길 바라지만 그런 소문을 접하는 국민은 불안하다. 작은 허점도 허용치 않는 용의주도함과 노련함을 외교당국에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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