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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도 어렵다 하니 …” 22년 만의 카르텔 허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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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9면

‘하도 어렵다고 하니 느슨한 카르텔은 허용하겠다. 하지만 본격적인 건 안 된다’.

불황으로 고통받고 있는 레미콘 업계의 카르텔 인가 요청에 대한 공정거래위원회의 결정이다. 공정위는 산업 합리화와 불황극복 차원에서 향후 2년간 레미콘 업계가 공동으로 품질을 관리하고 연구개발도 함께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고 21일 발표했다.

이에 따라 지역 레미콘 조합들은 콘크리트시험원을 중심으로 레미콘 품질에 대한 연구개발을 공동 진행한 뒤 연구성과를 함께 활용할 수 있다. 또 애프터서비스(AS) 관리와 하자보수도 공동으로 할 수 있다. 카르텔이 인가된 것은 1988년 밸브제조업체들이 5년간 생산품목과 규격제한에 대한 공동 행동을 허용받은 이후 22년 만이다.

하지만 공정위는 당초 업체들이 요청했던 ▶원재료 공동 구매 ▶레미콘 물량 공동 배정 ▶공동 차량·운송관리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것까지 허용할 경우 경쟁을 제한하는 부정적 효과가 더 크다고 본 것이다.

공정위 결정에 대해 중소 레미콘 업체들은 ‘사실상 기각’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중소 레미콘 업체들의 협의체인 한국레미콘공업협동조합연합회는 이날 보도자료에서 “원재료 공동 구매와 물량 배분 등은 불허하고, 공동 품질관리와 연구개발만 허용한 것은 사실상 기각”이라고 주장했다. 연합회는 또 “공동 연구개발과 품질관리는 공정위 인가를 받지 않아도 업계 자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것인데도, 공정위가 카르텔을 일부 허용해준 것처럼 포장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어 “건설업계와 시멘트업계의 의견만 수용하고 형식 논리에 치우쳐 불황으로 어려움을 겪는 중소 레미콘 업체들의 사정을 돌아보지 않은 결정”이라고도 했다. 연합회는 “일본처럼 소규모 레미콘 사업자의 공동 행위가 가능하도록 중소기업법 개정 등을 추진할 방침”이라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공정위는 어떠한 경우에도 ‘경성(硬性) 카르텔’은 허용하기 힘들다는 입장이다. 경성 카르텔은 가격·산출량을 담합하거나 시장을 나눠 경쟁을 제한하는 행위를 말한다. 레미콘 업계가 진짜 원했던 물량 공동 배정도 여기에 속한다.

누가 봐도 자유로운 시장경쟁을 방해하는 행위를 경쟁당국이 눈감아주기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공정위는 ‘연성 카르텔’에 속하는 연구개발은 경쟁을 제한하는 부작용과 시장 효율성을 높이는 긍정적 효과를 함께 따져 이번 경우처럼 사안별로 허용해주고 있다.

공정위 채규하 카르텔총괄과장은 “레미콘 업계는 가동률·수익률이 떨어지는 등 산업 전반의 재정적 어려움을 이유로 공동 행위 인가신청을 했지만, 이는 카르텔이 아니라 산업 자체의 구조조정이라는 보다 근본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설명했다.

서경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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