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가 있는 책여행] 가을 서정시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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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가을에는/기도하게 하소서······/낙옆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고독의 시인 김현승은 시 ‘가을의 기도’에서 가을에는 겸허한 모국어로 자신을 채우고 싶다고 했다.

노란 은행잎이나 단풍,또는 애기 국화꽃을 끼워 편지를 보내고픈 계절이다.누구라도 받아도 좋을 그 편지는 곧 자신에게 보내는 고독하고 겸허한 모국어다.그런 언어들이 영글면 서정시가 된다.

가을에는 우리 자신의 고독한 마음 속으로 멀고도 깊은 여행을 떠나고 싶다.그 쓸쓸한 여행의 동반자로는 서정시집이 제격이다.

서정시는 세상 밖으로 향하는 시가 아니라 결국은 인간 내부로 돌아오는 시다.꽉 짜인 언어로 이성이나 합리에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듬성 듬성 휑 뚫린 언어로 독자를 동참케하여 감정이나 혼에 둔중한 울림을 준다.

“물은 희고 길구나,하늘보다도./구름은 붉구나,해보다도./서럽다,높아가는 긴 들끝에/나는 떠돌며 울며 생각한다,그대를”(김소월 ‘가을 저녁에’ 중)한국 현대 서정시의 맨 윗자리 하면 누구든 김소월을 떠올릴 것이다.

일제하 현대시 초창기 다른 시인들이 사회성 짙은 시나 외국의 현대시 경향을 쫒기에 급급할 때 소월은 위 시와 같이 한국적 서정만을 고집스레 파고들었다. 그런 소월의 시를 통해 우리는 가을날의 황혼보다도 더 붉은 본래의 서러움과 그리움을 느낄 수 있다.

정지용은 ‘향수’에서와 같이 까닭모를 감상에 치우치지않고 보다 세련된 서정을 일궜으며 그가 문단에 데뷔시킨 박목월은 향토와 자연에 바탕을 두면서도 시공을 완전히 초월한 투명한 서정의 세계를 열었다.

이들과 더불어 신석정의 목가적 서정,김현승의 끝간데 없는 고독한 서정이 덧보태지며 전후 박재삼의 전통적 서정이 한번 더 깊이 있게 휘몰아치다 박용래에 이르게 된다.

“볏가리 걷힌/논두렁/남은 발자국에/딩구는/우렁껍질/수레바퀴로 끼는 살얼음/바닥에 지는 햇무리의/하관(下棺)./선상(線上)에서 운다./첫 기러기떼.” 박용래의 ‘하관’ 전문에서 보듯 가을이 깊어갈수록 모든 것은 소멸해간다.

빈 들판 빈 공간에 환한 햇살만 가득하나 그 햇살마저도 시인의 눈에는 매장되고 마는 완전한 소멸.그럼에도 기러기떼는 운다.결국 소멸되고말 우리의 생은 무엇이냐고 물으면서.가을 서정시들은 그렇게 대답이 주어질 수 없는 우리네 삶의 의미와 깊이를 물으면서 느끼게만 한다.

이미 한국서정시의 고전이 된 위 시인들의 시집들은 여러 출판사와 판본으로 나와 있다.그리고 미래사에서 나온 ‘한국대표시인 100인 선집’에 시인별로 한권씩 묶여나와 쉽게 구할 수 있다.여기에 덧보태 끊임없는 여행을 통해 가볍고 맑으면서도 죽음까지 보듬는 세계를 일궈낸 황동규씨의 연작시집 ‘풍장’(문학과지성사)도 가을 서정의 기품 있는 동반자다.

“냇물 위로 뻗은 마른 나뭇가지 끝/저녁 햇빛 속에/조그만 물새 하나 앉아 있다/수척한 물새 하나/생각에 잠겼는가/냇물을 굽어보는가/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는가/조으는가//조으는가/꿈도 없이”(‘풍장 70’전문).‘풍장’의 마지막 편이다.

가을날 풀잎이 사근사근 말라 바람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듯 주검을 세월의 바람에 날리는 ‘풍장’을 쓰기 위해 황씨는 14년간 전국 방방곡곡을 헤맸다.

자연 풍광에 헤드라이트를 켜가며 관찰하고 동시에 자신의 마음 속 깊은 곳을 들여다보며 쓴 이 시편들은 죽음도,해탈까지도 넘어서가는 가을날 소멸의 정서가 곧 삶의 깊이라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최근 나온 중진시인들의 시집으로는 정진규씨의 ‘도둑이 다녀가셨다’(세계사),

나태주씨의 ‘슬픔에 손목 잡혀’(시와시학사),

이기철씨의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아름다웠다’(민음사)가 가을에 읽는 맛을 더해준다.

“사랑이여,그렇지않았던가 일순 허공을 충만으로 채우는,경계를 지우는 임계속도를 우리는 만들지않았던가 허공의 속살 속으로 우리는 날아오르지 않았던가 무엇이 그 힘이었던가 사랑이라고 말할 수밖에는”

‘다시 쓰는 연서’ 전문에서 볼 수 있듯 정진규씨의 시를 통해서는 일상어와 행 나눔도 하지않는 시 형태등에서 바쁜 현대적 일상에서도 서정은 어떻게 길어올려지나를 보여주고 있다.

“누님,너무 곱소//가을볕에 새빨가이 익은/고추들 나란히 누워/비린 창자 속 말리고 있는/담장을 등에 지고서/골목길 가득 고여 출렁대는/햇살의 물결을 발부리로/찰랑찰랑 걷어차면서/이리로 오시는 누님의 한복 차림이”(‘가을볕’ 중)충남 공주에서 살고 있는 나태주씨의 시들은 오늘도 질박한 향토서정시가 건재하고 있음을 들려줄 것이다.

“언제나 단풍은 예감을 앞질러 온다/누가 푸름이 저 단풍에게 자리를 사양했다고 하겠는가/뜨거운 것들은 본래 붉은 것이다/여윈 줄기들이 다 못 다독거린 제 삶을 안고/낙엽 위에 눕는다/낙엽만큼 쓸쓸한 생을 가슴으로 들으려는 것이다.”(‘시월은 또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릴 것이다’ 중)절대 과장하지않고 단아하게,마음 가는 곧이 곧대로 시를 쓰는 시인이 이기철씨다.

그의 시대로 이 땅의 수많은 서정시인들의 좋은 시들은 비록 낙엽만큼 쓸쓸한 생일지라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그리움,에스프리로 하여 깊이와 의미를 지닌 삶이라는 것을 가슴 속에 감동으로 들려줄 것이다.

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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