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포럼] 북한 너무너무 잘 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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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제3차 남북 장관급회담에서 북측 단장은 남북관계의 진전이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포용정책의 결실이라는 이정빈(李廷彬)외교통상부장관의 유엔연설에 항의했다.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의 결단의 소산이라는 함축이다. 우리측 수석대표는 해명에 급급했다.

金위원장의 차하급 군부실력자인 조명록(趙明祿)국방위 제1부위원장이 방미, 한반도 평화문제를 본격 논의할 것으로 비쳐 金대통령의 남북간 평화협정 체결 염원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

*** 매사 똑부러지는 일처리

회담과 방북 대표단의 일정 등이 북측의 일방적 통보로 시종일관하고 있다. 북측은 북에 부르고 싶은 사람이나 단체를 언제든 입맛에 맞게 부르고, 내려보내고 싶은 사람을 서울로 내려보내는 모습이 당당하다.

북측은 남측 제의가 자기의 입장에 어긋나면 딱부러지게 거부한다. 북측의 서울공연단조차 비위에 거슬리는 사항에 항의, 우리측을 기겁하게 만들었다.

김용순(金容淳) 노동당 통일전선사업담당비서가 우리의 임동원(林東源)국정원장과 회담하던 신라호텔에 남쪽을 비방하는 삐라 수백장이 뿌려졌다.

경찰이 북측에서 날아왔다고 추정했던 삐라가 호텔 내부에까지 어떻게 떨어졌을까. 남북 양쪽의 정보사령탑들이 회담하는 장소여서 국정원 요원 및 경찰들이 삼엄하게 경비했던 호텔인 데도 말이다.

더구나 우리 당국은 야당이 이를 발설하기 전까지는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대남비방 삐라가 공공연히 살포돼도 문제삼지 않는 남쪽이니 북측은 정말 남는 장사를 잘 하고 있지 않은가.

어디 그 뿐인가. 金대통령은 평양 방문에서 돌아온 서울공항에서 "여러분(金위원장 등)이 말한 장기수 문제라든가 그런 것도 내가 국민 하고 상의해 처리하겠다" 고 金위원장에게 약속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정부가 장기수 문제를 포함해 북측이 우리에게 지원을 요구한 여러 물목과 사항을 국민과 상의해 결정하고 시행하려 한 흔적을 찾을래야 찾을 수 없다.

장기수 문제가 그랬다. 식량지원은 분배투명성조차 확보하지 못한 채, 더구나 계약서도 작성하기 전에 선적이 이뤄졌다. 이런 기막힌 우호적 환경을 북측은 만끽하고 있을 것이다.

향후 지원물목이 줄줄이 나올 모양이다. 金대통령은 식량의 추가지원을 이미 밝혔다. 전력은 물론 송배전시설 및 발전소의 건설비 지원도 가시화할 전망이다.

우리측이 매달렸던 경의선 복구공사의 공동 기공식 거행이 물거품이 된 배경에도 심상치 않은 얘기가 나돈다. 북측 구간의 건설에 동원키로 된 인민군 3만여명에 대한 인건비 지원문제가 걸려 있다는 설이 그것이다.

정부는 일부 대기업들에 대북투자를 권유하고 있다. 기업인들이 살얼음판의 경제상황에 대처하느라고 미온적이자 모종의 조사설 등이 유포돼 압박을 당한다는 항설도 있다.

우리 정부가 '민족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자' 는 6.15 공동선언을 실천하기 위해 이처럼 애쓰는 판이니 북측은 앉아서 꽃놀이 패를 즐기는 형세가 아닌가. 그러니 "북한이 너무 너무 잘 한다" 는 감탄이 안나올 수 없다.

*** 한쪽만 변화해선 곤란

반면 우리는 화해하자는 판에 삐라를 살포해도 말 한마디 못하고, 장기수를 북송한 판에 임동원 원장은 "국군포로는 없다" 는 북측 주장에 동의하듯 했다.

북측은 노동당 창건 55주년 '명절' 을 축하하도록 남측의 30개 정부.단체에 초청장을 보내왔다. 당국간 협력이 잘 돼가는 판에 굳이 이럴 필요가 있겠느냐는 정부의 점잖은 문제제기가 있을 법하지만 말이 없다.

북한은 자기들에게 걸림돌이 된다는 사항에 대해선 남측에 할 말은 다 하는데 우리는 행여 북측이 노여워할까봐 전전긍긍하는 형세다.

金대통령이 "(포드의 대우차 인수포기에) 농락당해도 반박할 자료도 없다" 고 한탄한 정부의 대외 협상력 부재는 정부의 대북자세에서 전이(轉移)된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통일은 상호체제의 수렴에서 이뤄지는 것이 최선의 형태일 것이다. 서로간에 변화하고 이해하려는 자세가 선결조건이다.

북은 어쨌든 남측을 교육시키는 것에 열심인 데 비해 우리 정부는 '우리부터 변하면서 퍼다주자' 는 유화책으로 나가고 있다.

그러나 이젠 우리도 북측을 교육시키는 전략을 병행할 때가 됐다고 본다. 그래야 남북관계가 선(善)순환기에 접어들 것이다.

이수근 <통일문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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