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티 경찰이 17일(현지시간) 수도 포르토프랭스 도심에서 상점을 약탈하는 시민들을 향해 위협 사격을 가하고 있다. 구호품 도착이 늦어지면서 생필품을 찾아 헤매는 약탈자들이 늘어 아이티 치안은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 이르고 있다. [포르토프랭스 AP=연합뉴스]
17일 오전 10시(현지시간) 아이티 수도 포르토프랭스의 폴 스타디움. 이재민으로 가득 찬 운동장에 구호물자를 실은 한국기독교연합 봉사단 트럭이 들어섰다. 조용하던 운동장은 금세 소란스러워졌다. 지진 발생 후 닷새째 굶은 시민들은 구호차량을 보자 흥분하기 시작했다. 트럭은 순식간에 이들에게 에워싸였다. 막대기나 삽을 든 사람도 보였다. 더 이상 구호활동을 진행할 수 없었다. 트럭을 운동장에서 철수시켰다. 그러자 사람들은 더 거칠어졌다. 호위를 해주기로 한 유엔군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봉사단은 황급히 현장을 빠져 나왔다.
그동안 안전지대였던 소나피(SONAPI) 보세구역에도 벌써 30~40여 명의 이재민이 떼지어 다니기 시작했다. 유엔군이 지키고 있는 이곳에는 한국 기업들이 입주해 있다. 이곳에 공장을 두고 있는 양희철 영사협력원장은 “전날까지만 해도 외부인은 공단에 들어올 수 없었으나 공단 안에서 무료 급식을 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유엔군 경비를 뚫고 들어오는 현지인이 부쩍 늘었다”고 말했다.
구호물자 배급이 지연되자 주민들이 동요하고 있다. 곳곳에서 구호단체를 호위하는 유엔군·경찰과 충돌도 빚고 있다. 이 때문에 구호품 전달이 더 어려워지는 악순환에 빠졌다. 그러나 아이티 정부는 물론 유엔군조차 상황을 장악하지 못하고 있다. 섣불리 개입했다가는 소요사태로 번질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이날 오전 포르토프랭스에서 가장 큰 라빌 재래시장은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었다. 무너진 상가 곳곳에서 약탈이 벌어졌다. 아예 트럭을 대놓고 물건을 실어내기도 했다. 구경꾼들은 약탈자가 물건을 꺼내올 때마다 환호했다. 긴 정글칼을 흔들기도 했다. 이날 대통령궁 인근 도심에선 수백 명이 상점을 약탈하자 경찰이 발포해 적어도 한 명이 숨지기도 했다. 경찰은 상가지역에 수십 명의 병력을 배치했지만 약탈을 막기는 역부족이다.
인접 도미니카공화국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는 전재덕 목사는 “한국에서 많은 구호단체가 아이티로 오고 있으나 현지 사정을 잘 모르고 있다”며 “감성적으로 접근했다가는 자칫 참사를 빚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날 아이티를 찾은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도 “구호물자 배급이 늦어져 치안 불안이 가중되고 있다”며 “최대한 이른 시간 안에 필요한 사람에게 구호품이 전달되도록 하겠다”고 강조했다.
정경민 특파원 jkmoo@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