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감원·국민은행 갈등 점입가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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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감독자와 피감자. 보통 갑과 을의 관계이지만, 이번엔 사정이 조금 다르다. 을이 갑을 코너로 몰고 있다. 금융감독원과 국민은행의 갈등이 그런 상황이다. KB금융지주와 그 계열사인 국민은행에 대한 금감원의 사전검사를 기록한 문서가 공개되면서다.

금감원은 격앙된 반응을 보이고 있다. ‘감독권을 침해하는 행위’로 규정하며 수사 의뢰 등 강경 대응에 나설 태세다. 문서의 내용만 보면 금감원의 입장이 어려워질 만하다.

본지가 입수한 ‘금융감독원 검사 수검일보’에 따르면 당시 금감원의 사전검사는 통상적인 조사로 보기 어려운 점이 많다. 지난해 12월 21일 금감원은 은행의 업무용 PC 13대를 확보하거나 자료를 파기하지 못하도록 봉인했다. 이 중 절반을 넘는 7대가 비서실·홍보실·카드마케팅부의 것이었다. 금감원은 또 강정원 행장이 차량 두 대를 두고 한 대를 사적으로 쓴다는 첩보를 확인하기 위해 상당한 공을 들였다. 금감원의 해명과는 달리 기사 두 명을 심야에 2시간45분 동안 조사하는가 하면, 면담시간에 제때 나오지 않았다고 다음 날 경위서까지 받았다. 누군가의 지시에 따라 입을 맞추느라 늦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의심했기 때문이다. 또 행장 차량의 운행 기록과 유류카드 사용 내역도 제출받았다.

경영건전성을 점검하기보다 주로 강 행장의 비리를 파헤치기 위한 ‘외곽 때리기’식 조사를 했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분명한 의도를 갖고 들여다봤다는 것이다.

이중조사 논란도 제기됐다. 2007년 국민은행의 자회사인 KB창투가 영화(‘어머니는 죽지 않는다’) 제작에 15억원을 투자했던 부분이 그렇다. 국민은행 노조는 당시 이 투자가 실무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 행장이 개입해 이뤄졌으며, 결과적으로 은행이 손실을 입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금감원은 2007년 11월 종합검사에서 이를 조사하고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러다 이번에 금감원은 담당 직원 4명을 불러 조사하고 PC를 확보했다. 금감원이 올해 영화 투자의 문제점을 지적할 경우 과거 검사를 허술히 했음을 자인하는 꼴이 된다.

KB금융 이사회 의장인 조담 전남대 교수 주변에 대한 조사도 이뤄졌다. 그가 재직한 전남대 경영전문대학원(MBA)에 국민은행이 은행 돈으로 지난 3년간 직원 5명을 등록시킨 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금감원은 국민은행이 조 교수를 염두에 두고 직원들을 보냈다면 사외이사에 대한 부당지원으로 볼 수 있다는 입장이다. 조 교수는 “아는 것도, 할 말도 없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국민은행이 동정만 받을 입장은 아니다. 검사 내용을 공개했다는 것 자체가 워낙 심각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이 문서는 국민은행 간부가 작성했으며, 은행 내부 경로를 통해 야당 정치인에게 전달됐다. 은행의 내부통제 시스템에 구멍이 생겼거나, 아니면 확실한 의도를 갖고 ‘결행’했다고 봐야 한다는 게 금감원의 시각이다.

금감원은 후자에 의혹을 두는 분위기다. 국회가 금감원을 압박해 손발을 묶으려는 작전이라는 것이다. 익명을 원한 금감원 고위 간부는 “당장 오늘(15일)부터 현장 검사인력들이 제대로 검사를 진행하지 못하고 있다”며 “다른 금융사 검사도 위축될까 걱정이다”고 말했다.

금융권에선 관치금융 논란을 떠나 은행 직원이 수검일지를 공개한 데 충격을 받고 있다. 익명을 원한 금융계의 한 관계자는 “은행이 여론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내부 기밀문서를 외부에 공개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한편 국민은행은 15일 보도자료를 통해 “경위를 조사 중이며 오늘 중 관련자를 문책하겠다”고 밝혔다.

김원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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