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순원 선생님 영전에 바치는 추모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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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저희 제자들의 큰 바위 얼굴이셨던 황순원 선생님!

가슴이 꽉 막힙니다. 돌아가셨다는 소식 앞에 말 그대로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느낌입니다.

지난해 연말 제자들을 불러 저녁을 사주시며 내년 정초의 세배는 받지 않겠다고, Y2K 소란을 핑계대실 때의 그 결연함 속에서 저희들은 선생님이 이미 세상사와 인연을 끊고 계심을 눈치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지난 여름 제자들과 함께 한 자리에서만 해도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하게 날이 선 혜안은 여전하셨기에 급작스런 소식은 더욱 큰 슬픔일 수밖에 없습니다.

대패질을 하는 시간보다 대팻날을 가는 시간이 더 길 수도 있다. 선생님의 말씀처럼, 절제된 문체에서부터 삶과 주변의 모든 것이 그러한 자제와 연마의 미학으로 빚어지고 정리됨을 저희들은 그저 경이롭게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왜곡되는 역사와 혼란한 현실을 단호히 비판하는 강직함을 늘 엿보이셨으면서도 그러한 현실인식이 작품 속에 함부로 노출되는 일은 결코 없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소설도 예술이어야 한다는 것을 끝까지 해 보이는 이 시대의 마지막 작가' 임을 다짐하시던 선생님의 철학이었습니다.

당시 상업주의와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된 문학이 기승을 부리던 때라 그 말씀은 더욱 비장하게 들렸습니다.

선생님은 진짜 애주가이셨습니다. 술이 가진 불량한 속성을 다스려 순종케 하셨기에 아무리 많이 드셔도 흐트러짐 하나 없으셨던 선생님!

이제 저희들은 제자들 주머니를 생각해 제안하신 회비제 술자리에서 기어코 내시던 회비도 못 받게 되었습니다.

술자리에서는 남의 얘기, 특히 살아 있는 사람의 얘기는 안 하는 게 좋다, 남의 얘기가 아니라 자신의 실수와 자신의 이야기를 할 줄 알아야 참된 작가라고 말씀하시던 선생님은 가셨습니다.

이제 이 세상에는, 작가는 작품으로만 말해야 한다는 정신으로 빚으신 선생님의 주옥 같은 작품과 고고한 삶의 자취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넘치는 슬픔을 잠시 가누고 영전에 잔을 올립니다. 그 동안 절제와 근엄함의 자세로 힘드셨던 이 세상의 짐 가벼이 내리시고 편히 쉬옵소서.

전상국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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