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언대] "인천상륙 50돌 맞아 손원일 제독 기려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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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9월 15일은 인천상륙작전 50주년이 되는 날이다.

인천상륙작전은 당시 군사전문가들의 예상을 뒤엎고 전쟁 흐름을 일거에 역전시켜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 세계전사에 길이 빛날 작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인천상륙작전의 성공확률이 5천대 1이었던 상황에서의 완벽한 승리였기 때문이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은 무엇보다 맥아더 장군의 오랜 전투경험과 결단력의 산물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은 수없이 많은 요인들 사이의 복합적인 상관작용을 거쳐 성립되는 것이어서 이를 순전히 한두 사람만의 공적이나 과오로 돌리려 할 때는 상당한 무리와 오류가 따르게 마련이다.

때문에 인천상륙작전 50주년을 맞는 오늘, 맥아더 장군의 빛나는 업적 아래 역사 해석의 뒤안길에 놓여 빛을 보지 못했던 우리 해군과 해병대의 공로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당시 우리 군은 해군함정 15척, 해병대 2천8백명, 육군 제17연대 1천9백명 등 총 1만3천3백여명의 병력과 장비가 참가해 목숨을 걸고 임무를 완수했다.

특히 상륙작전 당시 한국측 총참모장으로서 유엔군 사령부에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고(故)손원일(孫元一)제독의 숨은 공로를 새삼 되새겨보고 싶다.

우선 孫제독은 선견지명을 가지고 해군과 해병대를 창설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전투함인 백두산함을 마련하는 등 해군력 증강에 박차를 가한 주인공이다.

실제로 한국 해병대는 미 제5해병연대와 협조해 인천시가지 점령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고, 백두산함은 1950년 6월 25일 밤 후방을 교란하기 위해 6백여명의 무장 게릴라를 싣고 침투한 북한무장선박을 대한해협 근해에서 격침시켜 훗날 상륙작전을 가능케 했다.

또 孫제독은 뛰어난 통찰력과 판단력으로 해군특공대를 연흥도.덕적도 등에 파견, 전초기지를 확보해 갔고 인천항에까지 침투시켜 각종 정보를 수집해 상륙작전의 교두보를 마련했다.

특히 상륙작전을 불과 며칠 앞둔 9월 3일 국방부로부터 급히 해병대를 왜관전선에 투입하라는 명령이 하달됐으나 맥아더 사령부가 상륙작전을 비밀리에 추진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진해로 출동하려는 해병대를 현위치에 대기토록 해 자칫 상륙작전에 차질을 빚을 뻔한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기도 했다.

孫제독은 우리 장병들의 든든한 정신적 지주이기도 했다.

부산항을 출발할 때부터 한국 해병대의 주력을 태운 피카웨이호에 동승, 해병대와 함께 인천에 상륙하는 등 외국 지휘관의 작전통제를 받으며 생사를 건 작전에 투입된 우리 장병들에게 孫제독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커다란 힘이 됐다.

상륙작전 이후 서울 탈환에 이르기까지 한국군을 대변하고 한국 국민의 보호에 가장 앞장선 사람 또한 孫제독이었다.

서울 입성이 지연되자 서울 일대를 폭격하려는 미군의 계획을 제지하기 위해 孫제독이 직접 적진정찰을 나서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곁에 있던 부관이 적의 총에 맞아 숨지는 등 여러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孫제독은 서울 수복과 동시에 서울시민에게 알리는 포고문을 발표해 민심을 조기에 안정시키는 한편 전후상황을 이승만(李承晩)대통령에게 보고하는 자리에서 "비록 적에게 협조한 사람이라도 그 내용과 상황에 따라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협조한 점은 고려해야 한다" 고 李대통령을 설득하기도 했다.

바다로부터 한국전쟁의 승기를 마련한 인천상륙작전 50주년을 맞는 오늘, 그동안 묻혀왔던 孫제독의 업적이 우리들에게 너무나도 새롭게 빛나 보인다.

김현건 <해군본부 군사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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