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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서예 가르치는 '과외 스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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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자, 한번만 더 써볼까. 천고마비(天高馬肥)…."

지난 2일 오후 8시쯤 울산시 온산공단 남측 끝단의 봉화산 중턱에 자리잡은 금어사. 요사채(스님이 기거하는 방)에서 스님의 지도하에 초.중학생들이 한문.서예 공부에 열중하고 있다.

밖에는 뎅그렁뎅그렁 풍경소리가 장단을 맞추고, 1.5km쯤 떨어진 바다에선 어선들이 절을 향해 깜빡 깜빡 불빛을 비추고는 먼바다로 떠난다. 과외를 받고 있는 학생의 부모가 고기잡이 떠나면서 인사하고 있는 것이라고 아이들은 설명했다.

회갑을 눈앞에 둔 지월(59) 스님이 가정형편이 어려운 초.중학생 10여명을 무료로 가르친 지 4년째. 학생들은 온산공단 확장공사로 철거 중인 울주군 온산읍 우봉마을의 어민 자녀다. 학원이 있는 온산읍내나 울산시까지 가려면 버스로 30여분이 걸리는 데다 부모들이 대부분 고기잡이로 빠듯이 생계를 이어가는 처지여서 학원비 마련도 힘들다.

지월 스님이 이곳에서 과외를 시작한 것은 2001년 10월. 철거를 앞두고 흉흉해지고 있는 마을 민심을 다잡아 달라는 한 신도의 요청에 따라 우봉마을 내 빈방을 얻어 불당을 차리면서다.

"빵 한 개를 놓고도 싸우던 애들을 보고 시내에 나갈 때 빵을 사다 나눠주고, 다쳤을 때 약을 발라줬더니 차츰 어린이들이 마음의 문을 열고 공부까지 가르쳐달라고 찾아오더군요."

이렇게 시작된 지월 스님의 과외는 지난 6월까진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하루 2~4시간씩 했다. 과목도 영어.수학.한문.서예 등 4개였다. 지금처럼 매주 토요일 오후, 한문.서예만 가르친 것은 암자가 산속으로 옮겨가면서 애들이 매일 찾아가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허강희(온산초등 4년)양은 "스님한테 배우기 전에는 꼴찌에서 3등이었는데 요즈음은 학원 다니는 애들을 제치고 반에서 3등을 한다"라고 말했다.

스님의 어린이 사랑은 이뿐이 아니다. 철마다 어린이들을 부산 어린이대공원.해수욕장 등으로 데려가 기를 살려줬다. 지난달 중순엔 부모를 대신해 온산초등학교 가을운동회를 찾아 사진을 찍어주며 아이들과 어울렸다.

그는 "과외를 하며 속세에 파묻히면 출가한 의미가 퇴색된다고 걱정하는 분도 계시지만 중생을 구제하겠다면서 산속에 파묻히는 것이야말로 모순이 아니냐"라고 말했다. 지월 스님은 진주공고를 졸업해 20년간 군무원으로 직장생활을 했고, 1995년 출가제한 연령인 만 50세에 명예퇴직금 1억3000만원을 남겨놓고 부인.자녀(아들 둘)를 떠나 구례 화엄사에서 불가에 귀의했다.

울산=이기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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