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장규 칼럼

쌀은 아직도 농민의 피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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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10년 전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이 타결됐을 때 국내는 한동안 시끄러웠다. 쌀 개방 일정이 국제적 약속으로 확정됐기 때문이다. 어느 토론장에서 재야 원로 한 분이 마이크를 잡고 일갈했다. "쌀은 우리 농민의 피입니다. 따라서 쌀 개방은 목숨 걸고 막아야 합니다. " 그러자 당시 농민운동의 핵심 주역이었던 C씨는 뜻밖의 발언으로 찬물을 끼얹었다. "쌀은 쌀이지, 어째서 쌀이 피입니까. 언제까지 그런 식으로 농민들을 선동할 겁니까. "

*** 쌀값 되레 올려 '거꾸로 정책'

물론 C씨 역시 쌀 개방을 강력히 반대해 왔었다. 다만 농민 감정만 자극해서는 어렵게 꼬인 일을 더 어렵게 만들 뿐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 즈음부터 그는 반체제적 농민운동의 틀에서 벗어나 '대안찾기 농업운동'으로 업을 바꿨다. 세계무역기구(WTO) 체제를 현실로 받아들이면서 한국 농업의 새 살길을 스스로 찾아나갈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럭저럭 벌써 예정됐던 10년이 지났다. 수입쌀 방어는 의무수입량(4%)으로 버텨 왔는데 그나마 올해 말로 끝이다. 다시 협상을 벌여 쌀 개방을 더 늦추거나 의무수입량 증대 요구를 최소화해야 하는데, 도무지 그럴 전망은 희박하다. 협상 자체가 미국.중국은 칼자루를, 한국은 칼날을 쥐고 있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결말이 어떻든 간에 쌀개방 폭의 확대가 불가피한 현실로 닥쳐 왔고, 그럴 경우 과연 무난히 소화해 나갈 수 있을지가 걱정이다.

지난 10년 동안 제대로 대비해 왔었다면 지금의 고민은 훨씬 덜했을 것이다. 농업구조조정 명목으로 정부 예산이 40조원 이상 들어갔건만, 정치 선심용이 대부분이었고, 국제 쌀값과의 격차 축소를 위해 내렸어야 할 쌀값은 오히려 올려 왔다. 추곡수매값은 10년 동안 다섯차례에 걸쳐 26% 인상됐다. 정부.국회가 합작으로 '거꾸로 정책'을 펴 왔다. 잘못해온 대가를 앞으로 더 비싸게 치를 각오를 해야 한다.

노무현 대통령도 선거 당시 토론을 통해 "특단의 대책을 세우겠다"고 약속했었다. "정책을 통해 대책을 세워야지, 떼만 쓰면 안 된다. …농민 피해는 사전에 대책을 세워야 하며, 보상계획과 개방협약이 동시에 통과되도록 제도화하자"고 말했었다. 중기재정계획에서 농업 부문에 119조원을 책정한 것이라든지, 국회 동의제 폐지를 포함한 정부 수매제도를 내년부터 개편하겠다는 것 등이 바로 그런 맥락의 정부 입장으로 이해된다. 올해 추곡수매가격도 4% 내리겠다고 농림부가 밝혔다. 만시지탄이나 잘하는 정책이라고 응원을 보내고 싶다.

공은 일단 국회로 넘어간 셈이다. 과연 국회가 정부가 제시한 양정시스템 개편 과제에 대해, 궁극적으로는 쌀 수입 개방 문제에 대해 어떤 역할을 할지 주목거리다. 하지만 지금의 국회 분위기로는 추곡수매의 국회 동의제 폐지와 수매가격 인하 둘 중에 하나라도 되면 정말 다행일 거다. 어쩌면 이번 가을 국회는 두 문제 모두 논의도 제대로 못 해보고 쌀 개방 문제로 혼란만 거듭할 가능성마저 배제할 수 없다. 집권여당이든 야당이든 누구도 앞장서길 꺼릴 게 뻔하다. 쌀 이야기만 나오면 꼼짝 못 하는 게 국회의원들인 데다 이미 자신들의 기득권인 국회 동의제를 포기하라는 요구에 순순히 응할 리 만무하다. 정치가 바뀌고 국회가 바뀌었다고 하는데, 정말 바뀌었는지를 시험해볼 기회이기도 하다.

*** 결국 해법은 국회의 손에

농민단체들은 어차피 방향을 정해 놓고 있다. 쌀개방 반대로 일전불사 태세다. 이들에게는 재협상에서 관세율로 가는 게 유리하냐, 의무수입량을 늘리는 쪽이 유리하냐의 논의는 별 의미가 없다. "쌀은 여전히 농민의 피"인 고로 어떤 일이 있어도 외국 쌀이 들어와 국내 쌀 생산 농민을 망하게 하는 일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쌀 문제를 떠나 죽어가는 농촌과 농업의 근본적인 구조조정 문제에 관해 서로 머리를 싸매고 해법을 찾아도 시원찮은 마당에, 눈앞의 현실은 원색적인 저항과 대립만 계속되고 있으니 딱한 일이다.

이야기를 정리하면 결국 해법은 국회 손에 달렸다. 욕을 먹고 홍역을 치르더라도 현행 추곡수매 제도에 칼을 댈 수 있을 것인가가 관건이다. 이게 안 되면 무려 119조원을 들인다는 농업농촌종합대책도 말짱 헛일이 될 것이다.

이장규 경제전문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