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우덕의 13억 경제학] 중국증시(65) ‘개혁은 로맨스가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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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증시(64)에서 이어지는 칼럼입니다. 앞의 글을 읽지 않으신 분은 이곳( http://blog.joins.com/media/folderListSlide.asp?uid=woodyhan&folder=1&list_id=11283664 )을 클릭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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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수리(胡舒立)는 1953년 베이징에서 태어납니다. 라오(老)베이징인 셈이지요. 외가집에 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전통적인 언론인 집안이었거든요. 어머니는 공인일보(工人日報)기자였습니다. 외할아버지(胡仲持)는 28살 때 '상보(商報)'라는 신문에 입사한 후 줄곧 기자, 번역가로 활동했답니다. 외할아버지의 형님이었던 胡愈之는 광명일보(光明日報)의 편집장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문재(文才)가 그의 피 속에 흐르고 있었던 게지요. 그러기에 기자가 되기로 했고, 베이징의 명문인 인민(人民)대학 신문학과에 입학했습니다. 그는 1985년 대학을 졸업하자 마자 어머니가 근무하고 있던 공인일보 기자로 취직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후수리의 언론인 생활이 시작됐습니다.

그는 기자 생활을 하는 동안 두 번 미국에 갈 기회를 얻게 됩니다. 1985년 미국의 한 연구소 초청으로 5개월간 미국 주요 도시를 돌았고, 1994~1995년에는 1년동안 미국 스탠포드대학에서 발전경제학을 공부합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이 미국 생활이 후수리의 언론관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지요. 언론은 어떤 외부의 압력에서 자유로와야 한다는 믿음이 형성된 겁니다. 1994년 그가 쓴 '개혁은 낭만곡이 아니다(改革沒有浪漫曲)'이라는 글은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미국에서 1년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후수리는 중화공상시보(中華工商時報)로 자리를 옮깁니다. 국제부 부장으로 일했습니다. 왕보밍을 만난 게 바로 그 때입니다.

1998년 어는 날 베이징 왕푸징(王府井)의 한 호텔에서 홍콩의 한 기업이 개업식을 열게 됩니다. 후수리는 개업식 취재를 위해 갔습니다. 왕보밍은 하객 중 한명으로 참석했고요. 모두다 즐겁게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부페였답니다. 그런데 유독 한 명만 이리저리 식탁을 돌며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후수리였지요. 그는 식사도 마다하고 취재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왕보밍은 후수리를 눈여겨 봅니다. 둘은 며칠 후 따로 만나 얘기를 나눕니다. 철학이 비슷했습니다. 모두 미국 유학 경험이 있는지라 언론 자유에 대한 믿음이 확고 했습니다. 왕보밍은 '언론은 무관의 제왕'이라며 독립을 강조했습니다.

왕보밍이 말합니다.
"잡지를 하나 창간하고자 한다. 편집장을 맡아주겠는가?"

후수리가 조건을 달지요.
"두가지 조건이 있다. 어떠한 경우에도 편집에 간섭하지 말 것. 다른 하는 취재 편집 예산권을 나에게 달라."

왕보밍은 잠시 생각하더니 흔쾌히 답했습니다.
"좋다. 두 가지 조건 모두 보장하겠다. 함께 해보자"

그렇게 1998년 차이징(財經)은 창간됐고, '왕-후'체제가 등장하게 됐습니다. 찰떡궁합이었습니다. 후수리는 차이징을 최고의 잡지로 키웠고, 왕보밍은 후수리가 마음껏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편집과 예산의 독립권을 줬습니다. 숫한 특종을 터뜨렸습니다.

차이징은 종이 매체로서는 드믈게 돈을 벌었습니다. 2009년 상반기에만 5000만 위안(약 85억 원)의 순익을 거두었지요.

명성도 얻고, 돈도 벌고...
그러나 왕-후 체제에 균열이 나타납니다. 작년 7월의 얘기입니다.

그들의 갈등은 다음 편으로 넘겨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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