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결단' 남은 북-일 수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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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지난 23일 밤 지바(千葉)현 기사라즈(木更津)시의 한 요리점은 북.일 수교협상의 뒷무대였다.

북측 대표인 정태화(鄭泰和)대사와 일본 대표인 다카노 고지로(高野幸二郞)대사는 약 네시간 동안 술잔을 기울였다. 동석한 사람은 통역뿐이었다.

다카노 대사가 과거 청산에 성의를 갖고 대처하겠다는 뜻을 전하자 鄭대사도 선(先)과거청산에 관한 태도를 바꿨다고 한다.

일본측에서는 북한이 모든 현안의 일괄처리를 주장해온 일본 입장을 받아들일 가능성도 있다는 관측이 돌았다.

그러나 그것은 희망이었다. 鄭대사의 태도는 바뀌었다. 24일 본회담에서 기존의 주장을 되풀이했다. 선 과거청산만이 북.일 수교의 기초라고 했다. 구체적으로는 과거에 대한 사죄와 보상을 들었다.

보상은 일제의 식민지 강점 및 지배에 따른 것으로 한일합방조약을 합법화하는 일본측 재산청구권 방식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못박았다.

鄭대사는 이날 밤 회견에선 발언 강도를 더욱 높였다. "철도의 침목 하나하나가 조선민족의 시체라는 것을 (일본은)알아야 한다" "일본의 30~40대가 치마저고리를 입은(조총련계)학생에게 칼을 들이대는 것은 조선민족에 대한 차별.멸시.배타적 정책의 산물이다" …. 과거 한.일 국교정상화 과정 때 보기 힘들었던 당당한 주장이다.

그러나 그의 태도변화는 재량권에 한계가 있기 때문인 것으로 일본측에 비춰졌다. 외무성 관계자는 "鄭대사는 아무런 권한도 없다" 고 꼬집었다. 기자들 사이에선 쇼맨십이라는 말도 나왔다. 재량권에 한계가 있기는 일본측도 마찬가지다. 양측 모두 상대방 입장을 훤히 꿰게 됐지만 거리를 좁히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일본에선 북.일 수교에 관한 정치적 결단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아사히(朝日)신문은 25일자에서 "이제 관료에 의한 준비는 끝났다" 고 했다. 과거청산과 납치문제를 현재의 협상방식으로 매듭지을 수 없다는 것이다.

정치권도 같은 움직임이다. 모리 요시로(森喜朗)총리는 24일 방문지인 인도에서 "북.일 정상이 생각을 직접 교환하는 것이 좋다" 며 정상회담에 강한 의욕을 보였다.

모리 총리는 다음달 유엔총회 때 김영남(金永南)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만나고 난 뒤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을 만나는 청사진을 그리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내치(內治)가 시원찮은 그에게 북.일 협상은 더할나위 없는 탈출구이기도 하다.

신중론도 있다. 북한에 구걸하는 형태의 정상회담이 되면 양보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이번 회담을 계기로 북.일 양측 모두 고위급 채널의 필요성을 느꼈을 가능성이 크고, 따라서 유엔총회 때 모리.김영남 회담 성사 여부에 따라 수교협상은 새 국면을 맞을지 모른다는 전망이다.

도쿄〓오영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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