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서태지 '영원한 인기' 비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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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서태지의 컴백에 환호하는 그의 팬클럽들을 보면서 기성세대는 그들의 ‘순정’에 의아해한다.팬들의 취향이 6개월이 멀다하고 바뀌는 초고속 시대에 그것도 은퇴한 스타를 4년 7개월이나 기다려준 팬들의 심리는 쉽게 설명이 되지 않는다.

팬클럽의 존재가 가수의 활동여부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은퇴한 가수를 그리워하며 그의 컴백 소식에 눈물 흘리는 그들의 모습은 서태지의 컴백 못잖은 충격이다.스타와 팬의 관계를 논하지 않고 현대 대중문화현상을 분석하는 일은 이제 불가능하다.스타는 팬들의 정체성과 욕망을 대변해주는 또다른 자아이기 때문이다.

#1 팬과 스타의 채널

서태지가 컴백 소식을 직접 팬클럽 사이트에 올렸다는 사실은 온라인 상에서 굳건하게 자리잡은 팬클럽의 위상을 확인시켜주는 것이었다. 1996년 3월 발족해 지금까지 명맥을 유지해온 서태지 팬클럽 서태지기념사업회(서기회)는 이번을 계기로 서태지 공식 팬클럽 사이트로서 면모를 과시했다

나우누리의 서태지 팬클럽 T&B(태지 앤드 보이스)의 회원은 1천5백명 가량.98년 이후로 활동이 거의 없던 회원 1천3백명 가량이 제명당하는 등 위기를 겪었으나 최근 서태지의 컴백 발표를 계기로 회원수가 크게 늘어났다.

T&B의 시삽인 강대훈(19·대학생)씨는 “회원중에는 서태지와 아이들이 은퇴한 뒤에 뒤늦게 이들의 음악에 매료돼 팬이 된 회원들이 적지 않다”면서 “다른 가수였더라면 활동이 중단된 상태에서 이렇게 팬클럽이 운영되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2 끼리끼리 문화

물론 가수들에게만 팬클럽이 있는 것은 아니다.하지만 공연장에서 스타와 함께 호흡을 하며 자신의 존재를 시각적으로 분명하게 드러낼 수 있다는 점에서 가수 팬클럽의 힘은 남다르다.

옷색깔을 맞춰 입는 것은 기본이다.HOT 팬은 하얀색,god는 하늘색이다. 이들은 공연장에 각기 하얀색·하늘색 비옷을 단체복으로 갖춰 입고 공연장에 끼리끼리 모여앉는다.

마치 대규모 체육대회에 참여한 각 팀의 응원단을 방불케한다. 아니나 다를까, 이들은 단체복을 ‘응원복’이라 부르고 자신들이 스타에게 열광하는 환호를 ‘응원’이라고 부른다. 최근 서태지 입국을 앞두고 서기회측도 공항과 공연장에서 ‘응원’을 논의중이다.

서기회측은 사이트 게시문을 통해 공항에서 팬클럽 회원들은 흰색 티셔츠로 통일해 입자고 제안해 놓은 상태다.

공연장이나 공개 방송 현장에서 자신들이 좋아하는 가수나 그룹의 공연이 끝나자마자 우르르 몰려나가 공연장을 썰렁케하는 것도 열성 회원들이다.

KBS의 한 관계자는 “방청하러온 팬클럽들을 섞어 앉히려 하지만 학생들이 말을 듣지 않아 애를 먹기 일쑤”라고 말했다.그는 또 “방송국 마당에서 각기 경쟁하는 그룹의 팬끼리 싸움이 벌어져 경찰이 출동하는 일도 종종 있다”고 덧붙였다.

그래도 공연기획사 관계자들은 “티켓 판매·홍보·공연 현장에서 팬클럽의 '진가'가 드러난다”고 입을 모은다.티켓을 수백장에서 많게는 천여장을 단체로 구입하는가하면 포스터와 전단을 돌리는 일도 마다하지 않기 때문이다.

공연 기획사인 셀 커뮤니케이션스의 송은정 실장은 “팬클럽의 가장 큰 역할은 공연 현장에서 분위기를 달구는데 있다”면서 “팬클럽의 활동이 열성적인 가수일수록 공연 기획사의 부담이 절반으로 주는 게 사실”이라고 귀띔했다.

#3 아는 것은 소유하는 것

“왜 팬클럽에 가입하느냐구요? 정보가 빠르잖아요.”

팬클럽 가입자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스타의 신상은 물론 근황과 공연계획 등 최신 정보를 누구보다 빠르게 입수할 수 있다는 것을 팬클럽의 큰 장점으로 꼽는다.‘얼마큼 좋아하느냐’는 결국 ‘얼마큼 알고 있냐’로 판가름된다.

스타의 실체보다 이미지와 더 가까울 수 밖에 없는 이들에게 ‘아는 것’은 곧 ‘소유하는 것’이 된다.메일로 스타의 새로운 소식을 전해 받고 뮤직 비디오 등을 함께 감상하는 영상회는 팬들끼리 합심해 정보 소유에 대한 갈증을 푸는 ‘그들만의 의식‘이다.

더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 직접 스타와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얻기 쉽다는 것.브리트니 스피어스의 팬클럽 베이비 블루의 회장인 이유림(23·직장인)씨는 “브리트니가 내한할 경우 회원들이 그를 직접 만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씨는 또 “친구들과는 좋아하는 가수가 확연히 다르지만 비록 나이가 다르더라도 같은 회원끼린 얘기가 잘 통한다”고 덧붙였다. 취향에 대한 동질감이 물리적인 거리를 넘어선다는 것이다.팬클럽 가입자들은 모두 “우리가 모여서 스타 얘기만 하는줄 아는데 실제론 그렇지 않다.살아가는 이야기도 하고 노래방도 간다”고 말했다.

유니버설 뮤직의 오윤성씨는 “영웅이 없는 요즘 시대에 스타가 곧 영웅이며 신화의 주인공”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과거 정치나 종교적 신념으로 정신적 우상과 영웅이 결정됐다면 요즘은 이미지로 대변하는 엔터테이너가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울면서 때로는 쓰러지는 등 한 스타를 향해 집단적으로 열광하는 공연장은 대규모 종교 의식이나 정치적인 집회 대신에 집단적인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키는 거의 유일한 장소가 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눈물과 박수,격정과 감동을 동반하는 스타와 팬의 애틋한 숭배와 사랑 뒤에는 이들의 관계를 통해 높은 부가가치를 생산하는 엔터테인먼트 산업 시스템이 자리잡고 있다.

“스타는 경제적 관점에서 매우 문제성 있는 필수품”이라고 한 영국의 영화학자로 ‘스타-이미지와 기호’의 저자인 리처드 다이어의 말은 지금도 그대로 유효하다.

이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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