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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탱화는 나의 삶이자 연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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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위크카피라이터, 영문 번역가, 달마도·탱화·단청 등 불교미술 작가. 한국에서 그만큼 다채로운 삶을 살아가는 외국인이 또 있을까? 브라이언 배리 씨는 지난해 10월에는 한국 문화예술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한국 정부로부터 화관문화훈장을 받았다.

불화작가 브라이언 배리 #“만봉스님은 80년간 그리셨다는디… 난 25년 동안 겨우 걸음마를 뗀 수준이여” #global citizens

40여 년간 선불교를 비롯해 한국 문화와 관련한 각종 서적과 영화 등을 영어로 옮겨 외국에 소개해 왔고, 전통 탱화를 계승·발전한 공로를 인정 받았다(영어로 번역한 책이 50권을 넘는다). 서울 정릉 산기슭의 배리 씨가 사는 아파트에 들어서자 불교와 도교가 한데 어우러진 탱화의 세계가 펼쳐졌다.

‘극락 보배나무’ 등 온갖 탱화가 병풍처럼 감싸 안은 작업실 곳곳에는 화필과 화선지가 널려 있다. 방 한편 책꽂이엔 ‘한국의 단청’ ‘한국 무신도(巫神圖)’ ‘Spirit of the Mountains’ ‘만봉 대종사’ 등 불교나 도교와 관련된 손때 묻은 책들이 가지런히 꽂혀 있다.

본디 배리 씨는 언론에 ‘기피증이 심한’ 사람으로 소문났다. 연말까지만 해도 한 방송국에서 매일 전화를 걸다시피해 다큐멘터리 촬영 협조를 부탁했지만 그의 고집을 꺾지 못했단다. “이제 내가 거절할 줄 알아서 그런지 연락이 뜸한 편이여.” 그가 유독 매스컴의 조명을 피해온 것은 그만의 ‘겸양’ 때문이다.

그는 뉴스위크 한국판의 취재요청에도 오랫동안 손사레를 쳐 왔다. 그런 그에게 11월 초에 발간한 창간 특집호에 실린 ‘한국 문화에 빠진 외국인들’ 기사를 내밀자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아조 복합적으로 거시기했네잉(여기서 거시기는 ‘취재’란 뜻이다). 그것도 모르고 내가 쓸데없이 고집을 피웠나 봐. 나만 하자는 줄 알았어.”

배리 씨는 말끝마다 ‘거시기’라는 사투리를 즐겨 쓴다. 그러면서도 그는 “내 말은 전라도 부안 표준말”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 ‘거시기’와 관련한 추억도 한둘이 아닌 듯하다. 10년 전에 태국 왕실사원의 부탁으로 탱화를 그려줄 때의 일이다. 당시 방콕에서 CNN 인터내셔널이 그의 탱화작업 장면을 찍어 미국에서 내보내자 보스턴에 거주하는 형님이 방송을 본 뒤 흥분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혹시 그 절 이름이 거시기 아니냐?” 영어든, 한국어든 말끝마다 튀어나오는 ‘거시기’란 말 때문에 형님이 우스갯소리를 한 것이다. 그에게 슬쩍 나이를 물었더니 “쉰 열다섯(65)이여”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아직도 혼자 사시느냐”고 농을 건네자 “그럼 반쪽으로 사는 수도 있나?”라는 해학적인 답변이 돌아왔다.

“기자양반, 혹시 노루궁뎅이버섯차라고 잡숴 보셨는가?”라고 그가 묻더니만 차 한잔을 내왔다(면역력 강화에 도움을 준다는 노루궁뎅이버섯은 한방 약재로도 쓰인단다. 거기다 생강, 대추, 감초를 넣고 끓인 차라고 한다). 노루궁뎅이버섯차를 마시다가 그가 스승인 만봉스님 이야기를 꺼냈다. 듣고 보니 그 차에는 배리 씨에게 탱화를 전수한 스님과의 인연이 녹아 있다.

만봉스님 “야, 옛날에 내가 금강산에서 기막힌 걸 먹어봤다.”

배리 “뭔데요? 스님.”

만봉 “노루궁뎅이버섯이다.”

그때 만봉스님께서 내놓은 버섯이 영락없이 노루궁뎅이 모습이었단다. 배리 씨는 만봉스님에 대한 그리움으로 요즘도 노루궁뎅이버섯차를 즐겨 마신다.

만봉스님(1919~2006)과의 인연은 어떻게 맺어졌을까?

“눈 뜨면 그림 그리고, 호흡이 가빠지면 제자 가르치다가 잠 오면 자는 게지”라는 말로 유명한 만봉스님은 한국 불화와 단청 그리기를 평생의 업으로 삼다가 돌아가신 큰스님이다. 그 인연은 배리 씨의 말마따나 “징그럽게” 길고 질겼다. 1967년 평화봉사단의 일원으로 일찌감치 한국 땅을 밟았던 배리 씨는 70년대부터 도자기든 뭐든 한국 문화와 관련해 닥치는 대로 배웠던 시절이 있었다.

그중 한동안 푹 빠져 지냈던 것이 ‘한지염색’이었다. 한지의 묘한 매력에 빠져 염색을 했던 그가 하루는 눈을 딱 감고 마음 내키는 대로 염색을 해보기로 작심했다. 그런데 하룻밤을 지나서 마른 종이를 살펴봤더니 우연히도 잿빛 승복 색깔이 보기 좋게 나와 있더란다. 게다가 한지 중간쯤엔 V자 모양의 나비무늬가 저절로 만들어져 있었다.

평화봉사단 동기로 절친한 사이인 게리 렉터 씨에게 그걸 보여주었더니 ‘나비춤’이란 그럴싸한 제목까지 붙여주며 “불교미술전에 한번 내보라”고 제안했다.

“그란디, 그게 덜컥 입선을 했다니께.” 당선작 전시회 때 그에게 한 노스님이 작품의 의미를 물었다. 그가 솔직히 자초지종을 말했더니 “그렇다면 나비춤 하는 데 가서 불교미술을 공부해 보라”고 말했다. 그 노승의 충고가 그 뒤로 “내겐 일종의 ‘화두’가 됐다”고 배리 씨가 말했다. 그러나 만봉스님도, 탱화도, 봉원사도 몰랐던 시절이라 그때 일은 금세 기억에서 희미해졌다.

그로부터 한참 시간이 흘러 미국에서 건축과 교수 한 명이 한국의 단청을 연구하러 왔다가 그에게 통역을 부탁했다. 그런 이유로 봉원사의 만봉스님을 찾아갔더니 마침 절 한편에서 음악소리가 들려 왔다. “저게 무슨 소리입니까?”라고 물어보니 스님께서 “거기서 나비춤 하는가 보다”라고 말했다.

나비춤은 석가의 영산회상 설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의식(靈山齋)의 일부로 승무의 일종이다. 그때 처음 뵌 만봉스님에게 “나중에라도 화실에 들러 불화 조성 과정을 구경해도 되겠느냐”고 청했더니 쾌히 승낙해 주셨다. 배리 씨는 이내 탱화의 묘한 매력에 빠져 들었다. 처음엔 탱화의 밑그림인 시왕초(十王草)를 모사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탱화를 알면 알수록 매주 한두 번 붓을 깔짝대서는 도저히 그릴 수 없는 그림이란 사실을 깨닫게 됐다. 그래서 아예 매일 화실에 엉덩이를 붙이고 스님의 한국인 제자 10명과 어울려 불화 수업을 하기로 작정했다. 하지만 나비 무늬가 이끌어준 탱화 그리기는 결코 만만치 않은 고행의 길이었다.

처음에는 스님이 차분히 설명해주는 법이 없어 거개가 어깨 너머로 배우고 연습하는 식이었다. 그가 만봉화실을 떠나려고 다섯 번이나 보따리를 쌌던 이유다. 2년에 걸쳐 시왕초 3000장을 그리는 호된 ‘신고식’을 치른 끝에 86년 2월부터 그는 중요무형문화재 제48호 단청장 만봉스님 문하에서 정식 수학하는 전수자가 됐다(그는 85년에는 대원정사 불교대학을 졸업했고, 87년엔 조계종에서 처음으로 외국인 포교사 자격증을 따내기도 했다).

한 장의 탱화를 그리는 데도 구도자의 길만큼이나 지난한 과정을 거친다. 먼저 밑그림을 그리고 안료를 칠하며 말리기와 색칠을 수 차례 반복해야만 깊이 있고 살아 있는 색깔이 나온다. 등장하는 보살과 동자 수와 그림 크기에 따라 다르지만 대개 가로 1.5m, 세로 1.5m의 탱화 한 폭을 그리려면 두 달이 족히 걸린다.

최근엔 파스텔로 탱화를 그리는 추세가 생겨났지만 그는 이를 한사코 거부한다. “그렇게 하면 그림에 신심(神心)이 생길 리 있겠는가!” 배리 씨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삶을 “멀리 떠날 팔자”라고 생각했단다. 그는 1963년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된 후 그의 뜻을 기려 만든 평화봉사단에 지원하기로 결심했다.

1967년 9월 한국파견 4기(K4)로 한국 땅을 밟은 그는 전북 부안군 보건소 변산면지소에서 2년간 근무하며 결핵관리, 예방접종, 모자보건 사업에 참여했다. 아일랜드 출신 이민 2세로 보스턴 인근의 웨이크필드(Wakefield) 현지의회 의원이었던 부친의 고집으로 코네티컷대에서 정치외교학을 공부했지만 본래 그의 관심은 그림 쪽이었다.

“집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야구광인 아버지가 ‘나가서 야구나 하라’며 밖으로 내쫓았다”고 그는 말했다. 정식으로 미술을 배우지 못했지만 그의 숨은 끼와 열정이 한국에 와서야 꽃을 피운 셈이다. 그는 한국에서 유리판화, 도예 등으로 미술의 영역을 조금씩 넓혀왔다(그는 변산 보건지소에서 근무했던 시절 초가집 하숙집과 아이 업은 부녀자를 표현한 유리판화를 꺼내와 보여주었다).

한국 생활에 푹 빠진 그는 평화봉사단 활동이 끝난 뒤로도 미국에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그의 방엔 아직도 그 시절에 만난 하숙집 주인 부부의 사진이 걸려 있다). 잠시 서울에 올라왔던 그는 다시 유엔 결핵퇴치 사업의 일환으로 북제주군 보건소에서 6개월 간 근무하기도 했다. 그 뒤로 잠시 고향인 보스턴에서 생활했지만 답답함이 그의 마음을 짓눌렀다.

“부안에서 나락 키우고 살다가 보스턴에서 양복 차림으로 일하려니 답답해서 환장할 노릇이더군.” 마침 그때 평화봉사단 측에서 한국에 다시 가볼 생각이 있느냐는 제안이 들어와 덥석 받아들였다. 1970년 7월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2년 남짓 평화봉사단 교육위원 부단장(K22)으로 서울에서 일했다.

평화봉사단 생활은 그렇게 끝났지만 그는 서울에 아예 눌러앉기로 결심했다. 한동안 서울에서 영어강사로 일하기도 했지만 넘치는 끼를 억누를 수 없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농악이었다. 평화봉사단 동기인 게리 렉터 씨와 함께 김병섭 호남우도굿 농악단에 몸담으면서 8년간이나 전통무용과 꽹과리를 배웠다(현재 뉴스위크 한국판에서 네이티브 체커로 일하는 렉터 씨는 설장구를 배웠다).

74년부터는 대기업에 영문보고서를 작성해주는 등 전문 번역 일을 하면서 “한국 문화를 더 넓게 배울 기회를 얻었다”고 그가 말했다(그는 2007년 7월 문화예술 분야에서 쌓은 공로를 인정 받아 영주권을 받았다). 배리 씨가 그리는 탱화는 대부분이 주문 ‘조성’이거나(이때 약간의 수입이 생긴다) 기증용이다(불교에서 탱화는 ‘제작’이란 말 대신 ‘조성’이란 말을 쓴다).

92년엔 고향인 웨이크필드에 세워진 한국 사찰 문수사에도 가로 3m, 세로 2m짜리 탱화를 그려 기증했다. Wakefield는 ‘깨어나는(wake) 들판(field)’이라는 뜻이어서 그곳에 절이 세워지게 됐다. 2002년엔 보스턴에서 가까운 케임브리지 선원에도 묵화 달마상과 관세음보살도를 조성해 기증했다. 그의 ‘그림 보시’엔 각별한 이유가 있다.

“내가 여태까지 한국에 징그럽게도 많은 신세를 졌잖여? 그래서 ‘언제 한국 왔느냐’고 물으면 ‘한국에서 신세진 지 40년 됐다’고 대답할 정도여. 주변에서 너무 잘해줘서 그 신세를 갚는 일이라고. 그 덕분에 태국 왕실사원에 탱화를 그려주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고….”

태국 왕실사원의 탱화를 그리게 된 사연은 이랬다. 1999년 태국 왕실사원 왓 수탓(Wat Suthat)의 법당 벽화를 구경하러 갔던 배리 씨는 그곳 부주지 스님과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서울에서 무얼 하느냐”고 스님이 묻기에 “단청도 하고, 탱화도 그린다”고 했더니 “혹시 그림 사진을 볼 수 있느냐”고 물어왔다.

가방을 뒤져 봤더니 마침 영락(불보살들이 몸에 거는 구슬 장신구) 그림 사진이 있었다. 그 사진을 본 스님이 반색하면서 왕실사원의 설법당 남문에 단청 문양을 그려달라고 간청했다. 그 뒤로 그는 사원 측에서 마련해준 승방에 묵으며 3개월간 단청 작업을 했다. 당초에는 그림만 그려주면 됐지만 태국 불교를 직접 체험해 볼 욕심으로 일반 스님들과 어우러져 똑같이 걸식하면서 그림을 그렸단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것이 꿈이었는지 생시였는지 모르겠어. 아득한 극락세계였다고 해야 할까?”

그에게 요즘 일과를 물었더니 먹으로 달마상을 그린다고 했다(일필휘지로 그리는 달마도와 달리 달마상은 일종의 초상화로 시간이 좀 더 소요된다). 웃기는 달마, 까부는 달마, 능청 떠는 달마를 즐겨 그린다. “보통의 달마 그림은 조금 무서운 표정이잖아? 사람들에게 친밀감을 주는 달마 그림을 그리고 싶었어.”

그 달마그림의 뿌리는 역시 해학 넘치는 전라도에서 왔다고 해야 할 듯하다. “전라도 사람들 정말 끝내줘. 장난기가 무지 발달해왔다고 해야 할까?” 석 달여 전에는 인사동 화봉갤러리에서 불교미술의 거장이자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였던 만봉스님의 불화 전승회전에 참여했다. 그 전시회에 배리 씨는 금색으로 그린 작품 ‘노승’을 출품했다(그 그림들은 전시회가 끝난 뒤 강원도 영월에 건립 중인 만봉불화박물관에 영구 소장된다).

정월부터는 다시 탱화 작업에 골몰할 작정이다. 5m짜리 대형 탱화 그림이라 만봉화실에서 작업해야 한단다. 숭산스님이 리투아니아에 세운 절에도 ‘산신도’를 기증하게 된다. 리투아니아 출신의 비구니 스님이 부탁한 그림이다. “리투아니아는 산이 없어 호수와 숲을 배경으로 한 푸른 눈의 호림산신(湖林山神)을 그려줄 참이야. 그곳 사람들이 대부분 푸른 눈을 가졌거든.”

그에게 언제까지 붓을 잡을 거냐는 엉뚱한 질문을 해보았다. 우문에 현답이 돌아왔다. “손에 힘이 빠져 붓을 들 수 없을 때까지 계속 해야지. 만봉스님은 80년을 탱화 그리기에 몰두하셨는데 난 이제 겨우 25년이야. 걸음마 신세지 뭐. 내가 잘났다고 생각하는 아상(我相)부터 깨야 제대로 된 그림을 그리게 돼.”

몇 년 전 그는 서울 잠실에 있는 불광사의 광덕 큰 스님에게서 도해(道海)라는 법명을 받았다. 바다처럼 넓은 마음을 기르라는 뜻에서 지어준 이름이란다. 이 정도면 배리 씨도 산중인의 도를 절반은 이루지 않았을까? ■

강 태 욱 뉴스위크 한국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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