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정치자금은 치외법권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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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정부가 자금세탁방지법 제정을 재추진키로 했다. 외환거래 전면 자유화로 내년부터 돈의 국내외 이동이 한결 쉬워지는 점을 감안할 때 시기적으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조치다.

특히 국내 자금세탁 규모가 48조~1백47조원(1998년 기준), 불법자금 유출입 규모도 최고 50조원에 이르며 지금도 계속 늘고 있다니 국가 경제 차원에서도 검은 돈의 흐름을 차단하기 위한 조치는 반드시 필요하다.

이와 함께 금융기관 직원들이 고객 돈을 다루다가 '수상한' 점을 발견할 경우 바로 신고하는 '금융거래보고법' 이 시행되면 조직범죄와 탈세.뇌물 및 재산 해외도피 예방에 한결 도움이 될 것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국가 중 돈세탁 방지 시스템이 없는 곳은 우리뿐이라 자칫 국제적 돈세탁 천국으로 전락할 위기에 처했다니 만시지탄(晩時之歎)의 감마저 든다.

그러나 이런 의미있는 대책을 추진하면서 재정경제부가 정치자금은 대상에서 제외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물론 자금세탁방지법의 주 목적이 밀수.마약.뇌물과 관련된 검은 돈이지 정치자금이 아닌 것은 사실이다.

또 1997년 한보 비자금 사건 이후 자금세탁방지법을 추진했다가 국회의 사실상 사보타주로 자동 폐기된 전례에 비춰볼 때 '정치자금을 넣었다간 법안 자체도 못 만든다' 는 재경부의 하소연도 이해는 간다.

그러나 검은 돈이 활개치지 못하게 하겠다면서 온갖 비리에 빠지지 않고 연루돼 '부패의 온상' 으로 불신받고 있는 정치판의 검은 돈을 대상에서 뺀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

정치자금법이 있지만 정치인의 자금 조성.운용을 투명하게 들여다 볼 수 있는 장치로선 미흡하다.

제도를 대폭 강화해도 모자랄 판에 '알아서' 빼겠다는 것은 정치권이 무슨 치외법권이라도 된 듯한 인상을 줄 뿐만 아니라 법의 형평성에도 맞지 않는다.

또 정치자금을 돈세탁방지법에 포함시키는 데 정치권이 거부감을 갖는다면 스스로 구린 데가 있음을 자인하는 꼴이다.

떳떳하다면 반발할 이유가 없다. 차제에 각 당 대표들이 앞장서 "우리도 포함시켜라" 고 공식 제의하고 나선다면 국민으로부터 박수를 받을 것이다.

우리 사회 각 분야에 얽히고 설킨 부정.부패 관행과 거대한 검은 돈의 준동이 IMF 위기의 한 요인이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 시급한 해결과제다.

또 돈 흐름의 투명성 확보는 국제적으로도 피할 수 없는 대세라는 점에서 자금세탁방지법은 빨리 만들어져야 하며 정치자금도 반드시 포함돼야 한다.

한편 이 법이 실효성을 거두기 위해서는 금융기관들이 '미심쩍은' 거래는 적극 신고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와 함께 개인의 비밀보호를 철저히 보장할 수 있는 강력한 장치가 꼭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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