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읽기] 상봉 뒤의 눈물 TV가 닦아줄 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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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만나니 눈물입니다/다섯 번이나 강산을 갈아 엎은/50년 기나긴 세월이 나에게 묻습니다/너에게도 정녕 혈육이 있었던가."

돌아가신 부모의 영정을 돌판에 새겨 가슴에 품고 온 북한 시인 오영재씨는 '다시는 헤어지지 맙시다' 라는 제목의 시를 이렇게 시작했다.

모처럼만에 전파가 낭비로 여겨지지 않는 순간들이었다.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에 비길 건가.

수십, 수백의 인생극장을 TV는 고스란히 생중계했다.90세 노모가 70세 아들에게 음식을 떠먹인다.

아들의 표정은 모자가 헤어지던 그 때 그 스무살 젊은이로 돌아가 있다.무용연습 간다고 가방 메고 나간 소녀는 예순이 넘은 교수가 되어 돌아왔지만 어머니 앞에선 여전히 열세살 소녀일 뿐이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세월이 정을 이기지 못한다.이 사실을 TV가 여실히 증명해 주었다.

훈장을 숱하게 받은 박사도, 일흔이 넘은 인민배우도 혈육 앞에선 모두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았다.후세의 사가들은 녹화 테이프, 혹은 방송사에 보관된 영상자료를 되돌려보며 2000년대 첫 광복절 즈음에 서울과 평양에서 벌어진 이 역사적 장면들을 가감없이 적어야 할 것이다.

살아 생전 전쟁과 이별을 실감나게 겪었던 시인 두보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절구로 읊은 게 있다."강이 파라니 새가 더욱 희고 산이 푸르니 꽃빛이 불붙는 듯하다.올봄이 보건데 또 지나가니 어느날이 이몸 돌아갈 때인가.풍경이 인간을 되돌려놓지는 못한다.그리움이야말로 그가 인간이요, 또한 살아있다는 증거다.

몇년 전 '21세기 대중문화 대장정' 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과정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지난 세기 그 숱한 노래 가운데 대중이 선택한 대표곡은 '돌아와요 부산항에' 였다.꽃피는 동백섬에 봄이 찾아와도 하늘의 갈매기가 슬퍼 보이는 건 보고픈 형제가 내 곁을 떠나고 없는 까닭이다.

우리 민족만큼 이별의 한을 절절이 간직한 민족이 또 있을까. 반세기 만의 가족상봉을 지켜본 이방인 기자는 감동의 휴먼 드라마라고 그 소회를 말했다.그 눈물의 재회가 드라마라면 도대체 그 시나리오를 만든 이는 누구인지 야속해진다.짖궂은 운명의 손에 나꿔채여 원하지 않은 역할을 맡은 사람들이 한없이 처량해 보인다.멀리서 온 사람의 감상을 궂이 캐물을 필요도 없다.

50년만의 재회보다 서태지의 컴백소식이 더 큰 이슈였을지도 모를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그 눈물은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까. 3박4일의 '축제' 가 끝났다.견디기 힘든 허탈감을 무엇으로 메울 것인가.

이제 TV가 그들의 눈물을 닦아줄 차례다.이별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크고 작은 노력들을 차분하게 엮어내야 한다.

감동의 휴먼 드라마를 지켜본 후 깨달은 것 몇가지. 전쟁은 다시 있어선 안 되겠다.하루 빨리 통일이 돼야겠다.무엇보다 가까이 있는 혈육에게 잘 해야겠다.서태지도 발해를 꿈꾸는데 겨레가 한마음으로 못 이룰 게 무엇이겠는가.

통일을 앞당기기 위해 TV가 나서야 할 일은 무궁무진하다.

주철환 이화여대 언론홍보영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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