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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 안 낳는 사회] 9. 프랑스와 일본-엇갈린 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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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일본은 첨단기술 제품이 정말 훌륭하다. 하지만 일본이 프랑스에서 하나 배울 것이 있다. 바로 출산 장려 정책이다." 지난해 9월 프랑스를 방문한 소니의 이데이 노부유키 (出井伸之) 회장은 자크 시라크 대통령으로부터 이 같은 충고를 들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도 일본의 출산 정책은 실패했음을 시인했다. 프랑스와 일본은 일찌감치 출산장려 정책을 썼다. 그러나 정책 성과는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두 나라의 인구정책을 들여다 봄으로써 우리의 저출산 대책을 모색해 본다. [편집자]

*** 성공한 프랑스

프랑스 파리 14구에 있는 몽수리 병원의 2층 산부인과 대기실.

스무평 남짓한 공간에 20개가 넘는 의자가 갖춰져 있지만 몇몇 임신부는 자리가 없어 서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병원은 항상 연구소처럼 조용하지만 산부인과만은 분주하다.

몽수리 병원 의사인 앙드레 나작은 "최우선적으로 임신부가 편안하게 애를 낳을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며 "그래서 여성들이 임신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감이 거의 없다"고 자랑했다.

파리 15구 데누에트 거리에 있는 아기용품점인 '소벨 나탈'.

아기옷과 젖병, 유모차 등이 빼곡하게 진열돼 있는 매장 사이로 물건을 고르는 예비 엄마.아빠의 손길이 분주했다. 계산대에서는 세 명의 점원이 줄지어 기다리는 손님들의 상품값을 계산해주느라 여념이 없었다. 아기용품 코너가 북적대는 곳은 여기만이 아니다. 대형할인점인 오샹.카르푸.모노프리 등도 마찬가지다. 저출산으로 아기용품이 안 팔려 백화점 등에서 매장을 속속 철수하는 우리나라와 대조된다.

프랑스가 아기를 많이 낳는 나라라는 것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프랑스 출산율은 2002년 기준 1.88명으로 한국(1.17명). 일본(1.32명)보다 훨씬 높다. 유럽국가 중 아일랜드에 이어 2위다. 이렇게 출산율이 높은 것은 편안하게 아이를 낳고 키울 수 있도록 정부가 각종 지원을 해 주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2001년 기준으로 해외령을 제외한 본토 내 인구가 5900만명. 1950년(4200만명)보다 40%가량 늘었다.

같은 기간 유럽연합(EU) 15개국 평균인 27%에 비하면 매우 높은 수치다.

프랑스는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30여년 동안 인구가 정체상태를 보였다. 프랑스 정부는 이에 위기감을 느끼고 2차 세계대전이 끝난 45년부터 지속적인 출산장려 정책을 폈다.

◆ 정책의 핵심은 가족수당=국립통계청(INSEE)에 따르면 프랑스는 1901~05년 사이 출산율이 유럽에서 가장 낮았다. 이에 따라 프랑스 정부는 1910년대부터 가족수당을 지급하기 시작해, 39년에는 법령화했다. 이후 출산을 장려하는 각종 지원제도가 나왔다. 임신 초기부터 지원해 주는 보조금과 직.간접지원제도, 정부가 모든 교육과정을 책임지는 공교육제도가 그 뼈대다. 가족지원제도는 주로 부모에게 지급되는 수당의 형태를 띤다. 이 중 가장 중요한 것이 가족수당이다. 정부 지원책의 28%를 차지해 현재 총 400만 가정이 혜택을 받고 있다.

또 영.유아수당, 육아보조원 고용수당, 개학수당, 자녀수와 연관된 주택수당 등도 있다. 총 1000만 가정에 지급되고 있다.

이 밖에 지역사회가 일부 혹은 전부를 부담하는 세금감면의 혜택도 있다. 정부가 직.간접적으로 지원하는 이 같은 돈은 매년 457억유로(약 63조원)에 이른다.

또 ▶직업을 가진 부모가 아이를 맡길 수 있는 탁아제도▶전 국민이 가입돼 있는 의료보장제도▶실업이나 장애에 대비한 사회보장제도 등이 있다. 모두 아이를 키우는 일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게 해주는 장치들이다.

◆ 각종 제도도 잘 갖춰져=프랑스는 남녀 구별 않고 출산휴가가 주어진다. 산모에게는 최소한 16주의 휴가 권리가 있다. 남성도 임금 근로자의 경우 출산휴가(11~18일)를 받을 수 있다. 여성은 출산휴가 이후에도 육아를 위해 추가적으로 휴직을 할 수 있다. 원할 경우 출산휴가 뒤부터 아이가 세살이 될 때까지 육아휴직을 할 수 있다.

또 아이들을 맡기고 일할 수 있는 탁아제도가 잘 갖춰져 있다. 부모들의 노동형태와 시간에 맞춰 다양한 방식의 탁아시설이 있다. 전국의 시.구 등 행정단위에서 탁아 시설을 설치.운영하고 있다.

파리=박경덕 특파원 <poleeye@joongang.co.kr>

*** 실패한 일본

지난 6월 일본은 충격에 빠졌다. 출산율(2003년치)이 1.29명으로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기 때문이다. 도쿄(東京)만 보면 0.9987명으로 여성 1명이 평균 1명도 낳지 않는다는 통계다. 언론은 연일 정부의 출산장려 정책 실패를 비판했다. 마침내 고이즈미 총리는 "지금까지 인구 정책이 충분치 못했다"고 시인했다.

최저 출산국에서 탈출한 프랑스.스웨덴 등 유럽 국가들을 배워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일본 서점가엔 '스웨덴은 어떻게 소자화(少子化 )국가가 되지 않았는가'란 제목의 책도 출간됐다.

일본은 한국에 비해 훨씬 오래 전부터 저출산 사회에 대한 위기 의식이 높았다. 1970년대 이후 출산율이 2명 안팎으로 떨어지면서 인구학자들의 우려 목소리가 커졌다. 하지만 전 국민적인 관심을 끈 계기는 90년의 '1.57 쇼크'였다. 한 여성이 평생 동안 낳는 아이의 수가 1.57명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저출산 사회의 일본식 표현인 '소자화 사회'라는 용어가 입에 오르내렸다. 정부도 본격적인 대책 마련에 나섰다. 경제기획청 장관을 역임한 사카이야 다이치(堺屋太一) 전 장관은 "세계 최장수 국가인 일본사회의 고령화가 소자화 추세와 맞물리면 생산력이 급격히 떨어질 것"이라고 설파했다.

◆ 인구정책 효과 없어 고민=출산 장려 정책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왜 효과를 거두지 못할까. 전문가들은 "일본 정부가 '고령화'대책에 초점을 맞춰 출산 장려 정책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특히 연금.개호(노인간호) 보험 등 고령화 대책을 우선해 예산이 집중됐다. 반면 출생 장려 정책에는 실질적인 지원이 따르지 않았다. 고이즈미 정권도 출범 직후 '보육원 대기 아동 제로 작전'이란 캐치 프레이즈를 내걸었다. "아이를 맡기고 마음껏 주부들이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겠다"고 큰소리쳤다.

하지만 올해 보육 예산은 3456억엔(약 3조5800억원)으로 지난해보다 오히려 1400억엔(약 1조4500억원)이 줄었다.

일본은 워낙 많은 고령 인구를 떠안고 있어 이들을 무시할 수 없다. 따라서 정부 정책의 우선순위도 '표'가 되는 고령층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일본의 특수한 사정도 저출산을 부채질하고 있다. 10년 이상 계속됐던 장기불황 등이 큰 원인이다. 남편의 실질 임금이 계속 줄다 보니 취업 여성이 출산을 연기 또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보육환경은 개선되지 않고 있다. 보육시설이 부족해 들어가기는 힘들고, 부모의 비용부담은 자꾸 커졌다.

정시에 맞춰 퇴근하기 힘든 일본 기업 풍토도 주부사원들에겐 고달픈 환경이다. 게다가 "여성=가사, 남성=일"이란 전통적인 구도 속에 "집안일은 남의 손에 맡기지 않는다"는 의식도 뿌리 깊다. 그래서 베이비시터.파출부 등 이른바 '가사 대체 산업'도 발달하지 못했다.

◆ 저출산 추세 개선 조짐 없어=일본은 최장 1년의 육아휴직이 보장되고, 이 기간 중 소득의 40%를 지급받는 제도가 있다. 그러나 여성은 비정규직 사원이 많아 사실상 권리 자체가 없는 것이 문제다.

여성 취업자 중 육아휴직을 사용한 비율이 14% 선에 그칠 정도다. 출산 후 이직 또는 퇴직을 할 수밖에 없다는 호소다. 태어나서 초등학교 3학년까지 지급되는 아동수당은 자녀 2명까지 각각 월 5000엔(약 5만원), 3명째부터는 1만엔(약 10만원)을 주고 있다. 그러나 턱없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내각부의 최근 여론조사에서 출산을 꺼리는 이유(복수응답)로 "아이 교육에 돈이 너무 들어서"(58.2%)가 가장 많았다. 또 "경제적 여유가 없어서"(50.1%), "일하며 아이를 키우는 것이 힘들어"(44.7%)가 뒤를 이었다.

이런 저출산 현상이 개선될 조짐이 없다.

'가계경제연구소' 조사에서 자녀가 없는 여성 중 "앞으로도 아이를 낳고 싶지 않다"고 답한 비율은 94년 9.34%, 97년 11.85%에서 2000년에는 19.39%로 뛰었다. 결혼을 않거나 미루는 여성도 늘고 있다. 최근 30대 초반 여성 미혼율(13.9%)을 보면 85년의 2배 이상이 됐다.

돗쿄(獨協)대학 아베 마사히로(阿部正浩.노동경제학) 교수는 "아이를 키우기 힘든 환경이 개선되지 않는 게 가장 큰 문제"라며 "고용불안 등까지 겹쳐 저출산 추세가 심화되고 있다"고 말했다.

도쿄=예영준.김현기 특파원<yyjun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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