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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깨운 이방인들, 한국인의 혼이 되어 잠들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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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서울 합정동 양화진(楊花津)은 한국의 개화기를 상징하는 ‘아이콘’이다. 그곳엔 절두산 성지와 선교사 묘역이 있다. 한국 땅에 신명(身命)을 바친 선교사와 순교자들의 피와 땀, 눈물의 흔적이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경술(庚戌)국치 100년. 분단의 아픔을 지닌 채 한국은 이제 9대 무역대국이 됐다. 경인년 새해를 맞아 양화진에서 번영과 품격의 21세기를 그려본다.

눈 내린 서울 합정동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 자신의 조국보다 한국을 위해 헌신했던 143명의 선교사 등 400여 명이 잠들어 있다. 신동연 기자


“내게 천 번의 삶이 있다면 그 삶 모두를 한국에 바치겠다.”
미국 텍사스 출신 25세 처녀 선교사 루비 켄드릭이 부모에게 보낸 편지 내용이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병마와 싸우던 그녀는 1908년 6월, 충수염으로 죽는다. 이 땅에 온 지 아홉 달 만이었다. 편지 내용처럼 그녀는 씨앗을 심듯 한국 땅 양화진(楊花津)에 심장을 묻어 한 알의 밀알이 되었다.

수많은 서양인들이 한국을 개화시키는 데 일생을 바쳤다. 우리에게 너무도 친숙한 언더우드·아펜젤러·헐버트·헤론·베델 등이 그들이다. 그들은 이역만리에 건너와 박해와 멸시, 천대와 인습의 한계를 극복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오롯이 바쳤다. 조선이 봉건시대의 깊은 잠에서 채 깨어나기 전이었다. 그들은 탐욕스러운 제국들의 사냥감이었던 ‘은둔의 왕국’에 학교를 만들고 고아원·병원·교회·신문사를 설립했다.
하지만 일제는 치밀하게 침략 수순을 밟아갔다. 을사늑약이 발표되자 미국은 즉각 공사관을 철수한다. 사전에 외교적·군사적 실력을 발휘한 일본의 기득권을 인정한 셈이었다. 안타까움을 금치 못한 미국 선교사 언더우드 부인은 “조선에 대한 미 정부의 정책에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고백했다.


갓 모양을 한 성당과 기념관 등이 있는 절두산 순교 성지. 겸재 정선이 그린 양화진(오른쪽). 신동연 기자


절두산 순교 성지,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했던 푸른 눈 선교사들이 잠든 곳! 버들꽃나루 양화진은 개화기 전야(前夜)의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벌어졌던 역사의 현장이다. 가톨릭과 개신교를 막론하고 한국 기독교의 손꼽히는 성소이다. 양화진 잠두봉(蠶頭峰)에 서서 유유히 흐르는 한강을 조망하며 도전과 응전의 문명사를 생각한다.
당산철교와 양화대교가 놓여 더 이상 나루 구실이 필요치 않은 현장에서 역사로 떠나는 시간 여행을 한다. 양지바른 외국인 선교사 묘원을 거닐며 이타적인 위대한 삶에 숭경을 표한다. 태평양을 건너와 이 땅의 오래 묵은 가난과 무지, 절망을 보듬고 순박한 백성들을 어루만져 준 고마움을 기린다.

북한산 줄기가 남으로 뻗어내려 청와대 뒷산 백악을 만들고 그 서쪽에 인왕산을 맺는다. 인왕산에서 무악재를 지나면 연세대를 감싸는 안산, 거기서 분기한 몇 가닥의 손가락 같은 지맥이 한강 유역 충적평야로 나지막이 기복한다. 양화진은 한강변의 버들과 잠두봉의 살구꽃, 울창한 솔숲은 드넓은 강 건너 선유봉과 어우러져 사대부들이 정자에서 시회를 열고 뱃놀이 하기에 더없이 좋은 승경이었다. 또한 중국 사신들을 위한 연회가 곧잘 베풀어졌다. 겸재 정선의 그림에 묘사된 양화진은 산수화의 극치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조에는 호랑이를 잡아 그 머리를 양화진 강물에 집어넣고 기우제를 지낸 기록이 나온다. 삼각산, 목멱산(남산)과 더불어 신성시되는 장소였던 셈이다.

양화진은 도성의 서교(西郊) 10여 리 밖에 있다. 서울이 나라의 수도(首都), 곧 머리라면 양화진은 인후부에 해당하는 곳이다. 삼남지방에서 올라오는 세곡선과 상선들이 서울로 들어오는 교통의 요지였다. 통행이 빈번해 기찰이 심한 군사 요충지였다. 양화진 일원은 강 폭이 넓고 물살이 완만해 병선 훈련장으로 사용됐다. 1419년 대마도 정벌을 꾀했던 태종은 소형 삼판선(三板船)을 건조해 시험했다. 세종은 병선에 화포를 장착하고 실전 훈련을 했다. 임진왜란 당시엔 행주산성 전투의 병참기지 역할을 했다. 병자호란의 경우에서 보듯 한강은 그 자체가 하나의 방어선이었다. 인조는 강화도 파천 계획을 세웠다가 청나라 선봉 기병대가 양화진 일대를 장악하자 남한산성으로 피난했다.

양화진 잠두봉이 지금의 절두산으로 명칭이 바뀐 것은 1866년 병인박해 때부터다. 가톨릭교 탄압 교령(敎令)이 포고되자 프랑스 선교사 9명과 신도 8000여 명이 학살되었다. 이때 탈출에 성공한 리델 신부가 톈진에 있는 프랑스 해군사령관 로즈 제독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로즈는 군함 3척을 끌고 인천 앞바다를 거쳐 양화진에 정박했다. 리델 신부는 통역관이 돼 프랑스 함대의 침략을 도왔다. 한국인 신도 최선일·최인서·심순녀는 물길 안내인으로 고용되었다.

이 사건은 흥선대원군이 천주교인 처형지를 새남터나 서소문 네거리에서 양화진으로 옮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때부터 ‘머리 잘린 산’으로 지명이 바뀌었고 나루터 행인들에게 보여주는 본보기로 효시(梟示)되었다.

“천주교인들 때문에 오랑캐들이 여기까지 왔다. 그들 때문에 우리의 강물이 서양의 배에 더럽혀졌다. 그들의 피로 이 더러움을 씻어내야 한다.” 대원군은 비이성적인 포고를 내렸고 절두산에서 178명이 처형된다.

강화도를 점령했던 프랑스 함대는 정족산성 전투에서 패주하여 한 달 만인 11월 11일 중국으로 물러갔다. 이때 프랑스군이 탈취해간 많은 서적과 자료는 훗날 한국학 연구 자료가 됐다. 전쟁이 문화 교류 기능을 한 역사의 아이러니다.

국제 정세에 어두웠던 대원군은 병인양요를 계기로 쇄국의 기치를 더욱 높였다. ‘오랑캐들이 침범하니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는 억지 논리를 밀어붙였다. 5년 뒤인 1871년, 대원군은 전국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운다. 양화진에도 세웠다. 개국의 출입문에 자물쇠를 채운 것이다.

1882년 8월, 한·일 간에 체결된 제물포조약과 한·일 수호조규 속약(續約)에 양화진을 개시장(開市場:교역시장)으로 한다고 명기했다. 중국 역시 같은 해 10월에 양화진 개시장을 요구하여 조약을 체결한다. 이후 영국·독일·이탈리아·러시아·프랑스 등 서구 열강과의 조약문에선 양화진 개시장 조건이 반드시 언급됐다.

갑신정변의 주동자이자 개화당의 영수였던 김옥균의 시신이 중국 상하이에서 끌려와 능지처참된 뒤 효시된 곳도 양화진이었다. 시신 앞에는 대역부도옥균(大逆不道玉均)이라 쓴 푯말이 세워졌다.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기치로 내건 정변은 청군의 개입으로 ‘3일 천하’에 그쳤다. 개국에 대한 백성들의 공포심은 더욱 커졌다.

양화진에 최초로 안장된 인물은 헤론 박사다. 그는 알렌·언더우드와 함께 제중원에서 의사로 일하다가 풍토병에 걸려 1890년 7월 소천했다. 겨우 33세 때였다. 당시 한국은 위생 환경이 나빠 천연두나 장티푸스 같은 전염병이 창궐했고 한 마을이 쑥대밭이 되곤 했다. 헤론은 테네시 의과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유능한 의사였지만 열악한 의료 시설로는 동료 의사들도 속수무책이었다.

헤론이 죽자 장지 문제가 대두되었다. 도성 안에 분묘는 엄격히 금지돼 있었다. 장례를 주관했던 선교회 측에서는 임시방편으로 집안에 무덤을 쓰기로 했다. 주민들이 들고 일어나 큰 소동이 벌어졌다. 조선 정부는 뒤늦게 서교 한강변의 넓은 땅을 내주었다. 미국 공사관 대리 공사인 알렌의 교섭 덕이었다. 이후 14개국 414명이 안장됐다. 그중 선교사는 가족을 포함해 143명이었다.

일제를 신랄하게 비판했던 ‘대한매일신보’ 발행인 베델(196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한국의 독립을 위해 평생 힘썼던 헐버트 박사(1950년 건국훈장 독립장)가 묻혔다. 새문안교회(한국 최초의 장로교회)와 조선기독교대학(연세대 전신)을 설립한 언더우드는 4대(代)에 걸친 7명의 가족이 묻혀 있다. 이화학당을 설립하여 근대 여성교육의 선구자로 추앙받는 스크랜턴 대부인, 배재학당을 세우고 한국 감리교회의 초석을 놓은 아펜젤러, “복음에는 신분 차별이 있을 수 없다”며 백정을 전도한 무어도 잠들고 있다.

무어는 숭동교회의 전신인 곤당골교회(롯데호텔 부근)를 세우고 낮은 데로 임하는 선교를 시작한다. 백정 박성춘이 콜레라에 걸리자 고종의 주치의 에비슨을 불러 치료한다. 이에 감동한 박성춘은 교회에 나왔고 양반들은 ‘천민과 함께 예배 볼 수 없다’며 따로 교회를 차려 나갔다. 하지만 무어의 소신은 분명했다. 박성춘은 양반보다 앞서 초대 장로가 된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일이었다. 그의 아들 박서양은 세브란스병원의학교를 나와 한국 최초의 의사가 돼 모교의 교수로 활동했다. 무어와 에비슨, 박성춘은 내각총서 유길준에게 탄원서를 보내 ‘백정 차별 금지법’과 백정들도 갓과 망건을 쓰게 해달라는 요구를 관철시켰다.

그곳엔 한국의 친구가 된 일본인도 있다. 한국 정부로부터 일본인 최초로 문화훈장을 받은 소다 가이치다. 소다 부부는 1921~45년 1000여 명의 고아를 자식처럼 돌보았다. 일제 패망 직후 귀국한 소다는 조국 일본의 회개를 외치고 다녔다고 한다. 한경직 목사의 초청으로 1961년 한국으로 돌아온 소다는 영락 보린원에서 95세로 세상을 떠나 아내의 옆자리에 묻혔다.

김종록 작가 중앙SUNDAY 객원기자 kimkisan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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