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reet Sketch] 킬힐 못 신고 어그 부츠 신지 않는 몇 가지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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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22면

나는 높은 굽의 신발을 신지 못한다. 특별히 척추 디스크가 있거나 발 생김에 문제가 있거나 하는 이유는 아니다. 그저 15년 전부터 자연스럽게 몸에 밴 습관이다. ‘안 신다’ 보니 이제는 ‘못 신게’ 된 경우라고나 할까.

솔직히 말하면 겁이 유난히 많고 운동신경은 젬병인 정신적·신체적 부족함 때문이다. 난 정말 손가락보다 가는 7㎝ 높이의 꼬챙이 위에 내 체중을 싣는 게 두렵다. 혹여 균형감각을 잃고 넘어진다면, 백두산 소나무보다 곧게 일자로 넘어질 게 뻔하다.

그래서 수십 켤레의 운동화와 더불어 살고 있다. 하지만 불편함은 없다. 정장을 입을 때도 재킷과 와이드 팬츠(바지통이 아래로 갈수록 넓게 퍼지는 디자인의 바지) 차림에 흰색 캔버스 화를 신는다. 요즘은 1970~80년대에 유행했던 에어맥스·펌프 등 투박한 디자인의 운동화도 즐겨 신고 있다. 스포츠 의류 브랜드마다 과거의 오리지널 디자인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서 새롭게 출시한 제품들이 인기다. 완벽하게 예의와 격식을 갖춰야 하는 자리가 아니라면(자신의 결혼식이 아니라면 이런 자리가 흔치는 않다) 정장에 운동화를 매치하는 일이 눈총 받을 때는 지났다. 오히려 스타일리시해 보인다.

겨울에도 내 신발장에는 부츠가 없다. 두터운 겨울용 운동화를 신다가, 조금 추우면 발목까지 오는 하이 톱 운동화로 바꿔 신는다. 레깅스를 신는다든가 할 경우 종아리가 시리면 레그 워머(발 토시)를 이용한다. 레깅스 색상과 비슷한 톤으로 넉넉한 사이즈의 워머를 골라 아래로 살짝 흘러내리도록 신으면 종아리도 날씬하고 길어 보인다.

가끔 우울하긴 하다. 예쁘고 멋지게 생긴 부츠들에는 왜 모두 5㎝ 이상의 굽이 달려 있는 걸까. 키가 커야 예쁘다고 인정받는 더러운 세상!

그런데, 웬만하면 낮은 데로 임하는 데 불만이 없는 내게도 원칙이 하나 있다. ‘어그 부츠(사진) 신지 않기’가 그것이다. 에스키모인들이 주로 신는 털 부츠에서 기본 디자인을 따온 어그 부츠는 굽이 거의 없다. 내부에 털이 달린 것이 많아서 보온성도 높다. 대부분 스웨이드 소재라 느낌도 부드럽고 색상도 ‘총천연색’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다양하다. 이만하면 나에게 좋은 조건이지만 그래도 신지 않는다. 내 나이와 옷차림에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출퇴근 길 에스컬레이터를 올라가는 행렬을 보면 나이 불문하고 여성 10명 중 3~4명이 어그 부츠를 신고 있다. 그런데 예쁜 모습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어떤 이들은 물을 찾아 가는 코끼리 떼처럼 보이기도 한다. 발목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종아리부터 발바닥까지 일직선으로 죽 뻗은 원통형의 주름 많은 코끼리 다리! 발목을 잡아주는 부분이 없이 일직선으로 이어진 어그 부츠는 소재까지 부드러워서 걸을 때마다 유난히 주름이 많이 잡힌다. 걸음모양이 올바르지 못한 사람이라면 신발의 복숭아 뼈 부분으로 땅을 딛고 걷는 흉한 경우도 연출된다.

‘킬힐’ 위에 올라앉은 종아리만이 아름답다고 얘기하는 게 아니다. 어그 부츠의 장점도 제대로 모르면서, 트렌드라니까 휩쓸리는 무신경한 쇼핑 습관을 말하는 거다. 어그 부츠는 귀엽고 발랄한 느낌의 옷차림에 적합한 신발이다. 요즘 어그 부츠 패션으로 뜨고 있는 유이와 황정음의 옷차림을 봐도 그렇다. 여행지에 어울리는 경쾌한 분위기의 반바지, 실수투성이 대학생 캐릭터에 어울리는 패딩 점퍼, 미니스커트가 대부분이다. 2004년 KBS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를 통해 어그 부츠 트렌드를 이끈 배우 임수정도 당시 캐릭터는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여학생이었다. 옷차림도 니트 망토와 코듀로이 반바지를 주로 입었다.

일단 한 번 상상해 보라. 일자 원통형의 코끼리 다리(유사품으로는 아톰 다리가 있다)가 귀여울 수는 있어도 섹시하거나 우아하거나 아름답게 보이진 않는다. 스타일이란, 전체적인 옷차림의 조화를 말한다. 유행 아이템을 모아 입고 신는다고 쉬이 만들어지는 종류가 아니다. 어그 부츠를 꼭 사고 싶다면, 옷장부터 먼저 살펴야 한다.

서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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