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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추억] 고 바실 프라이스 신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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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서강대 설립을 주도하고 국내 노동.인권운동에 많은 공헌을 한 바실 프라이스 신부가 지난달 29일 오후 7시30분 병환으로 선종(善終)했다. 81세.

1923년 미국 네브래스카 주에서 태어나 세인트 메리 칼리지에서 신학석사 학위를 받은 프라이스 신부는 34세 때인 57년 한국에 들어왔다.

그는 2002년 세상을 뜬 테오도르 게페르트 신부와 함께 서강대 설립을 이끌었으며, 이 대학에서 줄곧 사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88년 정년 퇴임했지만 지난 1학기까지 교양영어와 역사를 강의할 정도로 학생들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 넘쳤다.

프라이스 신부는 대학 설립뿐 아니라 66년 국내 첫 노동문제 전문연구소인 '산업문제연구소'를 서강대에 설립, 척박했던 시절 노동운동의 씨앗을 뿌렸다.

그는 국내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권익을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는 현실을 지켜보며 노동자들에게 노동법과 노조 조직법 등을 강의했다. 이 연구소는 2000년 문을 닫기까지 노동자와 시민단체 활동가, 정부 관료, 기업인 등 1만여명이 거쳐갔다. 한국노총 이용득 위원장도 이 연구소에서 수학했다. 그는 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99년 일가 김용기 장로의 정신을 기리는 일가상을 받았다.

프라이스 신부는 70년 가톨릭 정의평화위원회를 설립한 뒤 20여년간 간사를 맡는 등 인권분야에서도 주목받을 만한 활동을 벌였다. 권위주의 정권 시절 요주의 인물로 찍혀 감시를 받을 정도였다. 그는 지난 8월 초 대장암 말기 선고를 받았다. 서강대 측에선 호스피스 병원 입원을 권유했지만 그는 "병원비가 비싸다"며 거부하고 사제관에서 기도하며 죽음을 맞았다.

김정택 서강대 사제관 원장신부는 "우리 노동계와 학계에 큰 공헌을 한 분이지만 돌아가신 뒤 유품을 보니 챙길 만한 게 없었다"며 "사회와 수도자들의 본보기가 될 만한 분"이라고 고인을 추모했다. 빈소는 서강대 내 성당에 마련됐으며, 장례미사는 2일 오전 9시. 고인은 경기도 용인시 천주교 공원묘지에 안장될 예정이다.

박성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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