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옴부즈맨 칼럼] 공익 모색하는 지면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올 여름에는 한국전쟁에 관해 새로 나온 김동춘 교수의 '전쟁과 사회' 를 읽었는데, 그 책에서 우리 사회를 '피란사회' 라고 정의한 것이 매우 인상깊었다.

피란사회에서는 모두가 피란지에서 만난 사람처럼 서로를 대하며, 권력자와 일반 사람들 모두 어떤 질서와 규칙 속에서 살아가기보다 당장의 이익 추구와 목숨 보존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인데, 국가의 성립시기에 발발한 한국전쟁을 전후해 일어난 일들, 즉 최고 권력자의 무책임한 피란 행동, 국민을 보호하지 못했던 국가, 위기 극복을 위해 사람들이 행동한 방식 등이 피란사회의 기원을 이루고 있으며, 계속돼 온 정치불안 때문에 '피란' 은 만성적인 정치사회 현상으로 구조화했다고 보는 것이다.

피란사회론에 비춰 보면 우리 사회에서 공적인 영역의 공공성이 상시적으로 실종되는 현상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피란사회에서는 공익을 소중히 여기는 영역이 안정될 수 없고, 또한 그래 봤자 나만 손해를 본다는 피해의식 때문에 어떠한 합의도 이뤄지기 어려울 것이다.

***상업성에 밀려난 언론 사명

최근에는 텔레비전 지상파 방송들에서 무분별하게 범람하고 있는 선정성과 폭력성이 사회문제로 대두했고, 중앙일보는 그 원인이 시청률 경쟁에 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시청률 경쟁 때문에 그러한 방송을 하게 하는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방송국들이 스스로가 공적인 영역임에도 불구하고, 사적 수익을 위한 상업성과 모두를 배려하는 공공성 사이의 균형을 무너뜨린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비단 방송뿐 아니라 분명하게 공적인 영역으로 존재하는 언론.법률.정치 그 어디에서나 비슷한 현상, 즉 공공성과 공익보다 각자.각 집단의 이익추구에 급급한 현상을 목격하게 하는 공통의 원인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이같은 공공성의 실종을 고치는 방법으로 규제와 제한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효과가 있을지 모르나 궁극적인 치유책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에서 공공성이 무너진 원인은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합의로서의 규칙이 서 있음에도 이를 위반하기 때문이 아니라 합의되고 체화된 규칙 자체가 근본에 존재하지 않는 데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사회의 문화적 성숙 돕길

인터넷에서 한번 클릭하기만 하면 어른이든 아이든 노골적인 포르노그라피에 접근할 수 있는 시대에 한편에서는 작가의 작품을 음란하다고 무조건 규제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그 두 현상 사이에는 무지한 강요와 방치가 있을 뿐이지, 지혜로운 공익의 모색은 전혀 실감할 수 없다.

공적인 영역에서의 규칙이 체화돼 있지 않은 사회는 미성숙한 사회다. 각자의 이익의 충돌과 아우성 만이 존재하는 야만의 현상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공중파 방송의 선정성을 문제 삼는 것과 같은 공론조차 언제나 일회적으로만 제기되고, 다시 그 아우성 속에 묻혀서 잊혀지기를 반복할 뿐이다.

오랜 망각 속에 묻혀 버린 공공성을 회복하기 위한 궁극적인 치유책은 당장의 사태를 개탄하고 규제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정치적 구조의 진보와 더불어 공동체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과 집단들의 문화적 성숙을 도모하는 데 있다고 할 것이다.

자신의 이익 만을 급급해 하는 좁은 의식세계를 벗어나 더불어 사는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객관적으로 처신하는 지혜를 모아 공동선을 이뤄나가는 문화적 성숙으로서의 교양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그래서 신문의 문화란은 단지 문화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기능 때문에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 사회와 사람들의 교양을 도모하고 그에 기여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지면으로서 매우 중요하다.

현재의 문화 지면을 보면 종교계.문화계.예술계의 소식과 정보들로 채워져 있기는 하나 무언가 너무 비좁고 답답하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사회의 공적인 영역을 형성해 나가는 근원은 문화적 성숙에 있다는 자부심에서 출발해 상업성과 공공성 사이에서 고뇌하며 공익을 모색하는 신문의 입장에서 장기적인 기획과 방향성을 보여주는 지면을 만들었으면 하는 기대를 해본다.

<康錦實.변호사.지평법률사무소 대표>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