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정부는 현대서 손떼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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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현대그룹의 유동성위기를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정부와 현대의 줄다리기는 점입가경으로 돌아가고 있다.현대의 만기도래 채무에 대해 무조건 연장해주라고 정부가 금융기관의 등을 떠밀던 게 엊그제인데 이번엔 자구노력이 없으면 3부자가 퇴진하라는 강경방침으로 돌변했다.

현대의 태도를 보면 겉으로는 해결책을 내놓겠다 약속을 하지만 뒷전에서는 식구들간의 밥그릇 싸움에 더 열을 올리고 있다.

***양측 줄다리기 점입가경

도대체 문제의 핵심이 무엇인지,누가 책임을 져야 되는지,해결의 실마리는 어디에서 찾을 것인지 어느 하나 딱 부러진 설명이 없다.이러니 국민들은 불안해지고 시장은 냉소적으로 돌아설 수밖에 없다.사실 자금난 문제는 대다수 다른 기업들에도 해당되는 사안이다.

그런데도 현대사태가 유난히 관심을 끄는 것은 현대가 우리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그보다 현대가 직면한 문제들이 곧 우리 경제가 풀어야 할 숙제들을 집약해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재벌의 족벌체제에서 비롯된 경영상의 비효율,무분별한 확장투자로 인한 생산부문의 비효율,정경유착과 관치금융의 결과인 금융시장의 비효율 등 우리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는 구조적 문제들을 얘기할 때 빠질 수 없는 주인공이 바로 정부와 재벌이다.

흠이 없지 않은 정부가 재벌을 개혁하겠다고 나섰으니 일이 쉽지 않은 것이다.정부의 재벌개혁 노력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명분과 방법이 함께 충실해야 한다.

현 정부 초기에는 위기탈출이라는 절체절명의 과제가 있었기에 정부의 손에 칼을 쥐어주는데 국민들이 주저하지 않았다.그러나 '빅 미스테이크(big mistake)' 로 끝난 빅딜의 경우에서 보듯이 정부는 검법을 다지기도 전에 칼을 휘두르는 일에 급급했다.

경제주체의 이해관계가 얽히고 설킨 재벌이나 노동시장을 움직이고 경제를 지속적 성장기반에 다시 올려놓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비전과 전략의 수립이 선행됐어야 하는데도 뻔한 각론이나 먹히지 않는 구호를 가지고 전쟁을 치르려 했다.

결국 그릇된 방법의 채택은 지지부진한 구조조정, 악화된 경제집중도, 불안정한 금융시장 등의 현실로 나타났고, 그만큼 정부가 새로운 개혁의 칼을 휘두를 명분 역시 약해졌다.

그렇다면 정부의 해법은 무엇인가.약해진 명분을 최선의 정책으로 보완하는 길밖에 없다.무엇보다 지금은 정책의 신뢰도를 상실한 상태에서 일을 해야 한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정직하게 말해도 안믿을 판인데 관치금융은 없다느니 구조조정은 잘 되고 있다느니 하는 식으로 자가발전을 해갖고는 역효과만 낼 것이다.

나아가 정부가 해 낼 능력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별해야 한다.금융구조조정의 경우는 공적자금을 동원해서라도 정부가 나설 수밖에 없지만 기업구조조정과 재벌개혁의 경우에는 시장의 힘을 빌리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다.

현대를 포함한 부실기업들의 자구노력이 지지부진했던 데는 비효율적인 정부개입의 탓이 작지 않다.시장의 규율이 작동하도록 몇가지 투명한 원칙만 제시하고 정부는 뒤로 물러서야 한다.처음에는 생색 안나던 결합재무제표 정책이 이제야 빛을 발하는 것을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시장에 맡기는 게 최선

현대사태에서 보았듯이 채찍이건 당근이건 정부가 재벌과의 거리를 너무 가깝게 유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관리가 뇌물을 받는 것만이 정경유착이고 은행장을 정부가 갈아치우는 것만이 관치금융이 아니다.

정부가 능력 이상으로 개혁의 욕심을 내세울수록 시장을 소외시키는 정책수단이 사용될 수밖에 없다.워크아웃이니 채권전용펀드니 하는 자의적 정책수단이 더이상 먹혀들기 힘들 정도로 우리 시장은 자율화와 개방화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

현대는 이미 시장의 신뢰를 잃고 있다.시장이 제대로 돌아간다면 현대의 주인은 바뀔지 몰라도 경제가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다.결국 가장 강력한 재벌정책은 사사건건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자율적이고 공정한 경쟁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전주성<이화여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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