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여름축제] 1. 아비뇽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2면

유럽의 여름은 완전한 휴식의 시간이다. 이 시기를 위해 일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유럽인들에게 여름은 축제의 시간이다. 그래서 이때를 겨냥해 다양한 행사들이 기획된다. 실내보다는 야외에서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구성되는 게 대부분이다. 연극.오페라.재즈.클래식 등 문화와 휴양을 겸하는 유럽 축제의 현장을 찾아간다.

프 랑스의 아비뇽축제(7월 6일~30일)가 막바지에 이른 지난달 24일, 아비뇽에는 남불(南佛)하면 연상되는 온화하고 투명한 햇볕과는 달리 낮부터 변덕스러운 날씨가 계속됐다.

간간이 뿌리던 소나기는 오후가 되면서 바람까지 몰고와 가로수 이파리들을 울렸고 평소보다 두어 시간 빨리 어둠이 찾아왔다.

현지 안내원은 "늦겨울 3월 날씨 같다" 고 말했다. 밤 10시 연극을 보기 위해 공연장을 찾았다. 30분 전인데도 이미 3백 명 가량이 줄을 짓고 있었다.

중장년 부부에서부터 손자 손을 잡고 나온 할머니, 연인은 말할 것도 없고 혼자 나온 청년의 모습도 여럿 보였다.

그러나 10시가 지나도 공연장 문은 열릴 기미가 없었다. 하지만 누구 하나 사정을 설명하지도, 설명을 요구하지도 않은 채 느긋했다. 다시 20분이 지나 10시40분이 돼서야 객석에 앉을 수 있었다.

역사가 오랜, 낡은 성당 안에 있는 공터에 임시로 만든 공연장이었다. 잎이 무성한 아름드리 나무가 양쪽에 서 있고 그 사이에 반원형으로 무대를 꾸몄다. 철제 받침대에 나무 판자를 깔아 만든 객석은 발걸음을 뗄 때마다 삐걱거렸다.

그러나 배우가 등장하자 공연장은 잔잔한 바람소리만 남겨두고 정적에 빠져들었다. 상영작 '원숭이들의 동전' 은 이탈리아.일본.중국.프랑스 등 4개국 언어로 된 '다국적 연극' 이었다(프랑스 연출가 디디에 갈라 작품).

일본의 가부키, 중국 경극 등 동서양의 전통 연극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처음 만나 서로의 차이점과 유사성을 확인하면서 갈등을 해소하고 화해에 이르게 된다는 코미디물이었다.

관객이 대사를 알아듣지 못해도 배우들의 연기만으로도 의도를 충분히 알 수 있었다는 점에서 '몸짓언어의 예술' 이라는 연극의 본성을 잘 살린 작품이었다.

파고드는 밤바람에도 80분간 꿋꿋이 자리를 지킨 관객들은 막이 내리자 우레같이 기립 박수를 보냈다.

올해로 54회를 맞은 아비뇽축제 기간 중 고도(古都)아비뇽은 인구(9만명)보다 더 많은 약 12만 명의 예술가, 비평가, 애호가, 관광객이 찾아와 하루 종일 열기로 후끈거린다.

도시를 둘러싼 성벽을 경계로 예술공동체가 형성되는 것이다. 도시로 들어서면 우선 가로수와 벽 등에 즐비하게 나붙은 포스터가 눈길을 잡는다. 포장 박스 종이에 작품 사진을 붙여 만든 포스터는 다른 포스터를 조금도 가리지 않으면서 정연하게 배열돼 있다.

포스터만으로는 자기네 작품을 알리기에 미흡하다고 느끼는 극단은 거리로 뛰쳐나온다. 연극 속의 복장을 한 채 연극의 일부를 보여주거나,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며 팸플릿을 나눠주는 장면은 수시로 볼 수 있다.

아비뇽은 연극제가 중심이지만 사실 뮤지컬, 무용, 현대음악 등 다양한 장르를 포괄하는 종합예술축제다.

올해는 장 뤼크 고다르 감독의 영화 '작은 병정' '미치광이 피에로' 등에 출연했던 안나 카리나가 콘서트를 열어 주목받기도 했다. 올해 공식 초청된 연극은 35편. 비공식 작품은 5백50편이나 된다.

아비뇽, 글.사진〓이영기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