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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오늘] “굳세어라 금순아 …” 중국군 개입으로 빚어진 1·4후퇴 비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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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1·4후퇴 때 자유를 찾아 눈 덮인 산야에 끝없이 이어진 남부여대(男負女戴)의 피란민 행렬. 1951년 1월 8일 강릉 인근에서 찍은 사진이다.

1950년 11월 21일 미 제7사단이 압록강변 혜산진에 입성한 그날. 이미 ‘중국 인민지원군’은 국경을 건너 이 땅에 들어와 있었다. 50만 중국군의 공세에 밀린 유엔군은 후퇴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 금순아 어디로 가고 길을 잃고 헤매었더냐/ 피눈물을 흘리면서 1·4 이후 나 홀로 왔다.’ 듣는 이의 가슴을 시리게 하는 대중가요 ‘굳세어라 금순아’는 12월 15일부터 10일간 10여만 명의 피란민이 유엔군 선박에 올라 흥남부두를 뒤로 한 그때의 참극을 아프게 노래한다.

12월 31일 중국군의 정월공세가 시작되기 전 이미 84만 명의 서울 시민이 한강을 건넜으며, 이듬해 1월 3일 리지웨이(1895~1993) 주한 미8군사령관이 서울을 포기하자 나머지 30만 명이 피란길을 재촉했다. “부교의 상·하류에는 인류의 일대 비극이 연출되고 있었다. 혹한 설풍 중에 수많은 피란민들이 채 얼지도 않은 얼음 위를 미끄러지고 넘어지면서 건너고 있었다. 그중에는 얕은 얼음 속에 빠지거나 넘어져서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누구 한 사람 이웃을 돌볼 여력이라고는 없었다. 그러나 눈물을 흘리거나 흐느껴 우는 사람이 없었다. 눈을 밟는 신발소리만이 가팔랐고 탄식만을 남긴 채 피란민들은 문자 그대로 묵묵히 걸어가고 있었다”(『The Korean War』, 1967). 리지웨이는 1951년 ‘1·4후퇴’ 그때 한강에서 벌어진 참상을 자신의 회고록에 썼다.

“적군의 사기가 이전에 비해 한풀 꺾였다고 하지만 아직 26만 명의 병력이 존재하기 때문에 바로 한반도에서 떠날 리가 만무하다. 따라서 아군은 점진적으로 전진하는 공격 방침을 써야만 한다”(『팽덕회 연보』, 인민출판사, 1998). 펑더화이(1898~1974) 중국군 사령관은 정월공세 전인 12월 19일 마오쩌둥에게 보낸 전문에서 이미 전쟁의 장기화를 점쳤다. “우리가 반드시 충분한 준비를 갖추고 있을 때만 계속 작전을 수행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북한군이 1950년 6월에서 9월까지 범한 중대한 잘못을 다시 저지르는 꼴이 될 것이다. 중국과 북한 양국의 동지들은 인내심을 갖고 필요한 준비를 모두 해두어야 한다.” 이듬해 1월 16일자 전문에서 마오쩌둥은 스탈린에게 확전 불가를 건의했다. 그달 25일 시작된 유엔군의 반격으로 3월 15일 서울은 재탈환되었으나, 전선은 38선 근처에서 교착상태에 빠졌다. 6·25전쟁은 내전(civil war)이 아니라 국제전이었다. 대국굴기(大國<5D1B>起)를 외치며 제국의 반열에 오른 오늘의 중국도 한 세기 전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아픔을 다시 맛보지 않으려 할 것은 분명하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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