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주의자의 기록 '…세계사를 말한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9면

이 책을 이해하는 데는 우선 저자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도고 시게노리(東鄕茂德). 낯선 이름의 이 일본인은 치떨리는 식민지시대 일본제국의 외무대신을 두번이나 지낸 인물이다.

1941년 전범(戰犯) 도조 히데키 내각에서 처음 외무대신을 지냈고, 이어 종전 당시 스즈키 간타로 내각에 재입각했다.

통한의 역사를 회상하면 분명 이 인물에 눈길을 줄 이유가 없다.

그러나 그가 일본 군국주의의 망령에 나름대로 저항, 전쟁보다는 평화를 갈구한 노련한 직업외교관이었다는 사실의 발견이야말로 뜻밖의 행운이다.

이 책은 도고가 전후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기소돼 금고 20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50년 사망) 자신의 외교 역정을 정리한 비사(秘史)다.

그는 30세이던 12년 외교관으로 임관돼 첫 임지인 중국 선양(瀋陽)을 거쳐 스위스.독일.미국 등지서 폭넓게 활동했다.

문헌적 가치로 볼 때 이처럼 비중있는 인물의 개인사는 곧 시대의 동향을 읽는 사료가 될만하다.

저자도 "나의 행동을 변호하려는 게 아니라 지나온 시대의 움직임을 기술하고 또한 내 활동을 문명사적 측면에서 고찰해 보고자 하는 것" 이라고 적고 있다.

이 책은 20세기 전반 일본사 및 동아시아사를 정리하는 참고서로도 적당하다.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만주국과 소련의 국경분쟁, 동아시아 이권을 둘러싼 열강의 분쟁, 대평양전쟁시 대본영 연락회의, 최고전쟁지도회의, 어전회의 등 숨막히는 역사적 순간들이 생생하며 구체적으로 기술됐기 때문. 종전 직전 우리의 운명을 결정지은 각종 국제회담의 내용도 들어있다.

도고는 태평양전쟁 개전 시 도조 내각의 군부를 상대로 대미 양보안을 제출했고, 종전 내각에서는 결사 항전 주장에 맞서 전쟁의 무익함을 논박했다.

42년엔 대동아성(省) 설치에 반대해 단독 사임하고 은거의 길을 택했다.

'평화주의자' 도고의 일면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참고로 도고는 4백여년전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 도공의 후손이다. 다섯살때까지 박무덕으로 불렸다.

그러나 이 책에 그가 조선인으로 살았다는 흔적은 단 한 줄도 찾을 수 없다.

만약 독자들이 감상적 '핏줄' 에 기대어 당시 조선의 운명과 그의 활약상을 병치시키는 잘못은 범하지 않길 바란다.

정재왈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