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여당의 소탐대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절차를 무시하면 당장 눈앞의 이익에 흡족해할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큰 대가를 치르게 된다. 국회 운영위에서 국회법 개정안의 날치기 처리를 주도한 새천년민주당에 드리고 싶은 말이다.

*** 날치기는 정치적 자충수

물론 이번에 여당이 얻은 가시적 성과에 대해 축하부터 하는 게 순서일 듯싶다. 원내 제1당이 아니면서도 법안을 변칙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과시했으니 축하할 만하다.

비록 회기의 제약으로 본회의 상정에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앞으로 기회가 오면 신속한 국회 변칙운영을 할 수 있다는 능력이 검증됐다. 당 지도부로서는 능력있고 헌신적인 개혁 전위대가 있으니 마음 든든할 것이다.

또한 여당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자민련과의 공조를 복원해 정국의 주도권을 강화하게 됐으니 경축할 일이다.

각종 민생현안을 원하는 쪽으로 결정하고, 각 부문의 구조개혁을 완수하고, 대북관계를 능동적으로 이끌고, 차기 재집권의 고지를 선점한다는 여러 대명제를 위해 자민련과의 연대를 통한 세 불리기는 필수조건이다. 일거에 이 필수조건을 만족시켰으니 기습처리의 주역들은 여권 핵심부로부터 칭찬받을 만하다.

그러나 가시적 이득에 도취한 여당 의원들이 개혁 선봉장으로서의 무용담을 자랑하고 다니기 전에 심심한 애도의 뜻도 전하고 싶다.

운영위에서의 난장판이 절차와 제도를 중시하는 대의민주주의 이상을 깨버렸다는 원론적 말을 공익의 관점에서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정치인들은 순진하고 이상적인 말에 귀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신 이번 파동이 결국은 여당의 정파적 이익과 기반을 침식하는 정치적 자충수(自充手)라는 점을 애도하고자 한다.

대통령과 여당은 각종 개혁을 위해 광범한 사회 지지세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 지지세력이 날치기 공방으로 약화된다면 소탐대실이 아닐 수 없다.

아무리 머리 좋고 몸던져 일하는 행동대가 있어도, 자민련과의 공조가 아무리 강해도, 일반국민이 불신하고 언론이 비판하고 시민단체가 등을 돌린다면 개혁은 추진되기 힘들다.

과거 권위주의 시대와는 상황이 다르다. 사회적 지지세가 약한 경우에 밀어붙이기식 국정운영은 부분적 성과를 거둘지언정 근본적 성과를 볼 수 없다.

더욱이 야당인 한나라당이 과반수에서 조금 모자란 제1당인만큼 여당은 더욱 광범한 사회적 지지가 없으면 개혁을 도모할 수 없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 집권 초에는 참여민주주의 슬로건아래 시민단체들과 연대하고 일반 여론에 호소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이 근래에 둔화되는 듯했고, 이번 날치기 파동은 아예 찬물을 끼얹었다. 야당과의 대화를 포기하고 사회적 지지세의 규합도 못한다면 뭘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걱정스럽다.

일반국민은 구체적 정책내용이나 결과보다 정치권이 어떤 과정 속에서 작동되는가에 대한 인상에 따라 정치권을 평가한다.

비록 좋은 정책대안을 많이 제시한다 해도 의원들이 의정과정상 변칙운영 때문에 밀고 당기고 욕하는 모습이 방송되면 정치권에 대한 불신감은 극대로 올라간다.

그 불신감은 연유야 어쨌거나 분란의 원인을 제공한 측보다 날치기를 시도한 측에 더 많이 집중된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 국민의 신뢰에 큰 상처

혹자는 여당에 대한 불신감이 일시적이고 국민의 기억은 수년 후 선거 때까지 이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국회 운영절차의 훼손이 이번 한번으로 끝날까□ 이번에 여야관계가 극한적으로 경색된만큼 절차의 훼손은 앞으로 더 자주 있을 수 있고 그때마나 불신감은 팽창될 것이다.

여당은 이제 결과 강박증에서 벗어나야 한다. 어떤 결과를 이루는 것이 더 중요하기에 절차를 무시할 수밖에 없었다는 변명은 '새천년' 의 '민주' 와 어긋난다. 과정이 중요함은 도덕적 수사만이 아니고 정치적 격언이기도 하다.

과정상의 하자는 국민적 불신감을 증폭시켜 여당의 정치적 이익에도 장기적으로 해가 된다는 점을 명심했으면 좋겠다.

박성호 <경희대교수. 정치외교학>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