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남북 스포츠 하나 되는 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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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시드니올림픽 개막식이다. 남북 선수들이 함께 입장한다. 더 이상 '리퍼블릭 오브 코리아' 나 'DPRK' 가 아니다.

개막식 진행자가 '코리아' 라고 소개하자 한국 선수 3백50여명과 북한 선수 50여명이 섞인 대규모 선수단이 스타디움에 들어선다. '코리아' 란 팻말과 올림픽기가 선수단을 이끈다.

얼마를 기다렸던가. 북한이 올림픽에 참가하기 시작한 1972년 뮌헨올림픽 이후 남북은 네차례나 올림픽에서 마주쳤으나 서로 남 보듯 해왔다.

선수들 가운데 '올림픽의 꽃' 남녀 마라톤에 출전하는 이봉주와 북한 정성옥의 모습이 눈에 띈다. 둘이 나란히 금메달을 목에 걸고 남북 단일 출전을 호소하는 장면이 겹친다.

선수단 규모도 미국.중국.일본에 못지 않다. 남북이 하나 되면 우리도 이렇게 커질 수 있다는 뿌듯함이 밀려온다.

개막식이 끝나자 남북 선수들은 서로 선전을 다짐하며 아쉬움을 달랜다. 순간 남북 선수에게서 동시에 튀어나온 한 마디가 선수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우리 더 이상 적(敵)으로 만나지 말자. "

남쪽 마당쇠의 한 여름 밤 꿈이다. 마당쇠는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귀한 손님을 맞기 위해 매일 아침 마당을 쓸고 싶었다. 그러나 어느 날 마당쇠는 주인의 분부로 사이 나쁜 이웃을 혼내주기 위해 몽둥이를 들었다.

지구촌 평화축제 한마당이어야 할 올림픽이 정치 이데올로기의 총성없는 대리 전쟁터가 되면서 스포츠 역시 마당쇠 비슷한 처지가 됐다.

동서 냉전이 한창이던 80년대 초반 두 진영이 80모스크바올림픽과 84LA올림픽을 각각 보이코트할 때 몽둥이 대신 경기복을 입은 마당쇠들은 앞장서 전의를 불태웠다.

남과 북은 더욱 심했다. 동서 진영이 모두 참가한 88서울올림픽 당시 우리가 "We are the world" 를 외치며 '손에 손잡고' 를 노래부를 때 북측은 서울 하늘을 외면했다.

휴전선에서 지난 50년 가까이 남과 북이 대치했다면 스포츠는 몸과 몸이 직접 맞부닥쳤다. 다른 나라 선수에게 무릎꿇을 수 있어도 남북 대결에서는 기필코 승리해야 했다.

패배한 남쪽 선수는 죄를 지은 양 고개를 들지 못했고, 북쪽은 더해 아오지 탄광으로 끌려갔을지도 모른다.

초등학교 음악책에서 배운 노래 가운데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을 가장 자신있게 목소리 높여 부르던 시절이었다.

90년대 들어 남북은 축구와 탁구에서 등 떼밀리듯 단일팀을 구성해 국제대회에 출전하기도 했지만 돌아서면 아쉬움만 컸다.

그러던 남북 스포츠가 이제 한달여 앞으로 다가온 시드니올림픽에서 동시 입장을 추진 중이다. 분단 50여년만의 남북 만남을 과시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선심 쓰듯 만만한(?) 스포츠부터 손을 잡도록 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새 천년 첫 평화제전인 올림픽에서 지구촌 유일의 분단국가 선수단이 함께 입장하는 장면을 떠올리면서 우리는 벌써부터 가슴 설렌다.

우리는 56년 분단 상태이던 동.서독이 호주 멜버른올림픽 당시 선수단 동시 입장으로 전세계를 상대로 '깜짝 쇼' 를 펼쳤던 것을 기억한다.

그리고도 그들은 90년 통일까지 30년 이상 금지 약물까지 복용하며 '메달=국력' 싸움을 계속해왔다. 어제까지 몽둥이를 쥐게 해놓고 하루 아침에 악수하라고 다그칠 수는 없었기 때문일까.

이제 우리는 그동안 알게 모르게 굳어져버린 '북한=주적(主敵)' 이라는 인식을 스포츠에서만큼은 떨쳐버릴 때다.

그리고 귀한 손님을 맞기 위해 정성스레 마당을 쓸었던 마당쇠처럼 남북 스포츠는 하나 되는 그 날을 준비하는 동반자가 될 수 있도록 우리부터 나서야 한다.

설령 이번 남북 선수단 동시 입장이 무산되더라도 마당쇠의 '한 여름 밤의 꿈' 을 아름답게 간직해야 할 이유다.

최천식 체육부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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