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포럼] 판·검사들의 '독립운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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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무엇 하나 시원하게 풀리는 일이 없어 답답하던 차에 모처럼 법원.검찰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임기 만료로 물러나는 대법관들이 퇴임사를 통해 사법부 독립을 위한 메시지를 보내는가 하면, 현직 판.검사가 약속이나 한 듯 자신이 몸담고 있는 법원과 검찰의 개혁을 외치고 나서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 잇단 "법조개혁" 외침

며칠 전 대법관 여섯분은 합동 퇴임사에서 "천년의 역사와 전통이 하루 아침에 바뀌어진다고도 하는 급변하는 사회현상을 맞이해 실로 어느 선에 법의 잣대를 맞춰야 올바른 것인지 고뇌가 연속되는 세월이었다" 고 술회했다.

또한 "사법부가 급변하는 사회현상에 그냥 발맞춰 버린다면 법은 존재하지 않고 사회현상만이 존재할 뿐이고 사회가 변화하는데도 법이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면 법의 선언은 공허한 메아리가 되고 말 것" 이라고 후배 법관들에게 충고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퇴임사 마지막 부분이 압권이다.

"국민의 이름으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듯이 급조된 국민 여론을 내세워 법의 권위를 짓밟는 사회현상과도 냉철한 판단으로 대응할 때도 됐다고 보여진다" 는 대목이다.

언뜻 보기엔 별 것 아니라고 지나쳐버리기 쉽지만 자세히 음미해보면 그동안 재판과정에 외압이 있었음을 시인하고 이로부터 사법부가 독립해야 한다는 목소리인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권위의 상징이요, 사려 깊은 판단과 신중한 처신의 대명사격인 대법관들이 작성한 문장으로는 의미심장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과연 퇴임사에 나타난 '국민의 이름' 을 팔고 다닌 당사자는 누구이고 '급조된 국민 여론' 은 무엇이며 이를 내세워 법의 권위를 짓밟은 사회현상은 구체적으로 무얼 지칭하는 것이고 또 얼마나 자주 있는 일이었을까.

또 사법부의 '냉철한 판단으로 대응' 하는 현실적 방법은 무엇일까. 대법관들이 강한 의문을 남기는 퇴임사로써 사법부가 처한 현실을 국민에게 알리고 경종을 울리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물론 대법관들이 재직기간 중 이같은 의지를 갖고 실천에 옮겼으면 더 좋았을 것이란 아쉬움이 남기는 하지만….

그로부터 사흘 뒤 한 중견 법관은 공개적으로 신임 대법관 임명 때 추천방식을 바꾸자고 들고나왔다.

대통령이 임명한 대법원장이 독자적으로 대법관을 임명제청함으로써 사법부 독립이 위협받을 수 있으므로 각계인사 30~50명으로 법관추천회의를 구성하자고 제안했지만 부정적으로 보면 일종의 하극상인 셈이다.

거의 동시에 검찰의 정치적 중립을 위해 고위 공직자 구속 때 법무부장관의 사전승인을 받도록 돼있는 법무부 예규를 고치자는 현직 검사의 공개적인 외침도 있었다.

검사동일체의 원칙을 법으로 정해 상명하복(上命下服)을 강조하고 있는 검찰 조직으로선 심재륜(沈在淪)전 고검장의 검란(檢亂), 이종왕(李鍾旺)전 중수부 수사기획관의 사표파동과 맥을 같이하는 또하나의 항명이라 할 수 있는 '사건' 이다.

판.검사 두 사람의 아이디어는 새롭지도 않거니와 찬반이 엇갈릴 수 있는 내용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내용보다 이런 행동 자체가 용납되지 않는 법원.검찰의 풍토에서 자리를 걸고 고언(苦言)을 감행한 용기가 가상하다는 것이다.

*** 소장파 진정한 용기 기대

지금 법원과 검찰의 당면 공통과제는 국민의 신뢰 회복이고 이를 위해서는 정치적 중립이나 외압으로부터의 독립이 필연이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엘리트 조직인 법원.검찰이 홀로서기를 하지 못하고 수십년째 외부 눈치 보기에 급급한 것은 부인하기 힘든 현실 아닌가.

조직의 문제점이나 해결책은 내부에 있는 사람들이 누구보다 잘 아는 법이다. 현직에 있는 판.검사들이 어려움을 무릅쓰면서 외쳐대는 고민과 갈등의 목소리는 외부의 어떤 요구보다 값지고 의미있게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 부하들의 이같은 행동을 떨떠름하게 보는 법원이나 검찰 간부들의 시각도 바뀔 때가 됐다. 소장 판.검사들이여, 법원.검찰의 진정한 독립을 위해 튀는 목소리를 계속 외치자.

권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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