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제헌절에 생각한 권력구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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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한국 현대사를 연구해온 미국인 학자로 브루스 커밍스가 있다.

그가 1997년 현대 한국사를 통람하는 책을 펴냈는데, 이 책은 '양지(陽地)에 들어선 한국(Korea's Place in the Sun)' 이라는 제목부터 특이할 뿐 아니라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사실들을 밝혀주고 있어 흥미롭다.

그 가운데 5.16 쿠데타 후의 제3공화국 헌법에 관한 언급이 눈에 띈다. 이 헌법의 초안 작성은 당시 중앙정보부의 한 위원회가 주도했고 하버드대 정치학교수 루퍼트 에머슨이 도와줬다는 사실이 기술돼 있다.

미국 학자의 입김 탓이었는지 이 헌법은 우리의 역대 헌법 중에 여러모로 미국 헌법에 가장 가까운 모습을 갖고 있다.

이 점은 지금의 우리 헌법이 기본적으로 제3공화국 헌법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특히 관심을 끈다.

87년 시민항쟁 후 여야 합의로 헌법을 만드는 과정에서 당사자들 생각의 중심은 '유신헌법 이전으로 돌아가자' 는 데 있었던 것이다.

현행 헌법과 제3공화국 헌법의 전반적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점에서 양자 사이에 차이가 있다. 그 중 하나가 대통령 임기에 관한 부분이다.

제3공화국 헌법이 미국처럼 4년 중임제를 택했던 것과 달리 현행 헌법은 5년 단임제를 취하고 있다. 그 까닭은 새삼 말할 것도 없이 장기 독재정권 경험에 대한 반작용 때문이었다.

이 5년 단임제를 고치자는 주장이 정치권에서 고개를 들고 있다. 일부 여야의원들이 4년 중임제 개헌론을 제기하고 있고 여기에 부통령제 신설론이 덧붙여져 있다.

파업사태를 비롯한 혼란스런 사회상황 탓으로 잠시 수그러든 양상이지만 언제고 다시 개헌론이 부상할지 모른다.

개헌론, 특히 권력구조에 관한 개헌론은 우리에게 좋은 이미지로 와닿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늘 정변이나 정쟁과 관련해 시도되거나 강행돼 왔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지금 거론되는 4년 중임제 개헌론은 우선 외양에서부터 종래의 개헌론과 다른 면모가 있다.

비록 일부이긴 하지만 여야 양쪽에서 동시에 같은 주장이 나오고 있고, 반드시 특정 정당이나 정파의 이해관계 때문만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현행 5년 단임제의 폐해에 대한 문제의식이 널리 공유되고 있다고 보아 좋을 것이다.

현행 5년 단임제가 지닌 문제점은 크게 두 가지로 집약할 수 있다. 첫째 일찍 다가오는 권력누수 현상과 그와 관련한 정책집행의 졸속성이다.

좋은 취지를 지닌 개혁정책들이 많은 경우 좌초하고 마는 주된 이유는 정책추진의 졸속함 때문이고 그 제도적 요인의 하나가 5년 단임제에 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둘째는 대통령 임기와 국회의원 임기가 엇갈리는 데서 오는 폐해다. 여기서 자세히 말할 계제는 못되지만 중추적 권력기관들의 임기의 엇갈림은 정치의 불안정을 가져오는 중요한 원인이 된다.

현행 5년 단임제의 문제점이 적지 않다면 그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 마땅하다. 개헌이라는 절차가 번거로운 것이긴 하지만 필요하다면 감수할 수밖에 없다.

어제 7월 17일은 헌법 제정 쉰두돌을 맞는 날이었다. 우리의 개헌사는 곧 권력구조 개편사였고, 그것은 동시에 비정상적인 정변의 역사였다. 이제 이 어두운 개헌사에 마침표를 찍을 때가 됐다.

적어도 통일이 될 때까지 다시는 손대지 않아도 좋을 바람직한 권력구조를 차제에 정착시켜야 되지 않겠는가.

그 기초작업으로 국익 차원에서 이 문제를 체계적으로 다룰 공식적 기구가 필요하다. 예컨대 국회의장 임시자문기구로 중립적인 관계전문가와 정당의 관련 인사로 혼성된 개헌문제연구회를 두면 어떨 것인가.

이런 기구의 설치가 반드시 개헌을 전제한 것으로 단정할 것은 아니다. 문제가 제기되고 있는 만큼 공식적으로 이를 토론하고 결말을 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남북관계의 변화조짐에 대비한 작업은 권력구조 차원에서도 검토해야 한다.

양건 <한양대 법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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