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쓰레기 산' 붕괴 300여명 떼죽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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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쓰레기 매립장 주변에 살면서 쓰레기를 뒤져 연명해오던 필리핀 빈민 3백여명이 쓰레기더미가 무너지는 바람에 떼죽음을 당했다.

한순간에 생지옥이 돼버린 사고현장은 마닐라 근교 케손시의 파야타스 쓰레기 매립장. 지난 10일 오전 내린 폭우로 30m 높이의 '쓰레기 산' 이 무너지면서 판자집을 덮쳤다.

이 사고로 수백 채 가옥이 매몰돼 13일까지 3백여명이 숨지고 8백여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아직도 1백70여명이 실종된 것으로 필리핀 당국은 추산하고 있지만 쓰레기더미에서 뿜어 나오는 메탄가스로 실종자 대부분이 질식사했을 것으로 현지 구조대는 보고 있다.

적십자 관계자들은 "구호품과 약품이 턱없이 부족하다" 며 국제사회에 도움을 호소하고 있다.

마닐라 근교 케손시의 빈민 6만여명이 매립장 주변에 집단 주거지역을 형성하면서 사고위험은 도사리고 있었다.

이곳은 1990년대 중반 '스모키 마운틴' 으로 불리던 필리핀 최대 매립장이 폐쇄되면서 1천만 마닐라 시민이 쏟아내는 하루 4천5백t 쓰레기 중 1천여t을 받아왔다. 자연히 먹고 살기 막막한 빈민들이 하나둘씩 이 곳으로 모여들어 집단 주거지역을 형성했다.

쓰레기더미가 높아질수록 빈민들의 수도 늘었다.

파야타스 매립장 주변은 빈민들에게 생계를 해결해주는 일터이자 보금자리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밑바닥 사람들은 매립장을 '약속의 땅(루팡 판가코)' 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쓰레기더미에서 양철.플라스틱.판자 등을 주워 방 한칸짜리 집을 지었다.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새벽부터 밤늦도록 쓰레기를 뒤졌다.

먹다버린 음식은 끼니를 때울 수 있게 해줬고 빈병.플라스틱.신문지 수거는 돈벌이 수단이었다. 그러나 하루종일 일해도 어른의 일당은 고작 1백 페소(약 2천7백원). 여섯식구가 하루를 지내는 데 필요한 생계비(2백50페소)에 미치지 못한다.

이들은 쓰레기에서 풍기는 악취를 참아가며 피부병.콜레라 등을 앓아왔고 아이들은 천식을 달고 살아야 했다.

필리핀 정부가 지난해 이 곳을 폐쇄하려고 했지만 주민들은 생존의 터전을 잃을까봐 이주를 반대했다. 하지만 이제 파야타스 매립장은 가족과 이웃을 앗아간 비극의 현장이 돼버렸다. 사고후 교황 요한 바오로2세는 바닥인생을 살았던 희생자 가족들에게 애도의 메시지를 보냈다.

장세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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