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詩)가 있는 아침 ] - '뜰 앞의 배롱나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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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법인(1963~ ) '뜰 앞의 배롱나무' 전문

비 내린 산사의 아침
안개숲이 정적에 젖어 있고
뜰 앞의 배롱나무 한 그루 꽃피어
이리도 환하다
새들은 제 몸에서 나오는 소리로
무심히 꽃가지를 흔든다
다만 소리없이 머무는 것들
흘러가는 것들
그 내밀하게 몸짓하는 것들과 더불어
나도 그저 그렇게 머물고 흘러가고
흔들릴 뿐이다.
그리고서 오랜 세월 비바람 내리고
내 눈가의 잔주름 은밀한 웃음의 비
밀이 되거든
누이야,
모란은 천지간에 눈부시게 터지고
물소리는 끝도 없이 환하리라



무위 열반의 세계가 따로 없다. 어느 시인이 텅 빈 광야에 매화향기를 채워놓고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리듯, 배롱꽃이 피어 무심(평상심)의 경지를 더한다.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는 그 자리 배롱꽃 이울면 모란꽃이 피어 천지간의 물소리 환할 뿐. 마음이 곧 부처 아니겠는가.

송수권<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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