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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팀에 반한 영국인들, 축구화·양말까지 벗겨 갔지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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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영국인 영화감독 대니얼 고든은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8강에 오른 북한 대표팀의 경기를 비디오로 본 뒤 북한 축구에 반했다. 그는 북한 축구를 소재로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고 싶어 오랜 기간 북한과 접촉했다. 드디어 2001년 고든은 촬영 카메라를 갖고 북한에 들어갈 수 있었다.

고든은 당시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해줄 수 있는 소품이 필요했다. 그래서 월드컵에 출전했던 선수들의 집을 샅샅이 뒤져 유니폼·트레이닝복·축구화 등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아무리 뒤져 봐도 스타킹 한 짝 나오지 않았다.

“우리 선수들에게 반한 영국 사람들이 애들부터 노인까지 찾아와 유니폼·축구화·양말까지 완전히 깝데기를 벗겨 갔지요.” 골키퍼로 뛰었던 이찬명 선수의 설명이다.
더 안타까운 뒷얘기도 있다. 유니폼을 뺏기거나 선물로 주지 않은 선수들도 귀국한 뒤에 그걸 내복 삼아 입다가 해지게 되면 아무 생각 없이 버렸다는 것이다. 하기야 당시에 그 유니폼이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 아는 사람이 얼마나 있었을까.

16강 결승골 주인공, 박두익의 가슴 패치도
2007년 4월 3일. 경기도 수원 캐슬호텔에 북한 청소년(17세 이하) 축구 대표팀이 묵고 있었다. 선수단 단장으로 온 이찬명씨를 축구자료 수집가 이재형(47)씨가 찾아갔다. 그러고는 2006년 2월 영국 런던의 포토벨로 마켓(유명한 골동품 거리)에서 산 잉글랜드 월드컵 당시 북한 대표팀 유니폼을 보여줬다. 이씨는 이 유니폼을 2000파운드(당시 약 360만원)를 주고 샀지만 진품 여부를 확인할 수 없었다.

“맞습네다. 틀림없이 그때 우리가 입고 뛴 유니폼입네다. 북쪽에도 없는 걸 남쪽에서 볼 줄이야….” 이 단장은 감격한 듯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이 유니폼이 등번호 10번 강용운이 입었던 거라는 확인도 해 주었다. 서명을 부탁하자 이 단장은 ‘조국통일! 리찬명. 2007.4.3’이라고 써 준 다음 “(희귀품이라서) 돈 되겠네요. 잘 보관하시오”라고 농담도 했다.

2010년 남아공월드컵에 남북한이 동반 진출하면서 북한 축구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북한은 1966년 잉글랜드월드컵 이후 44년 만에 월드컵 본선에 얼굴을 내밀었다.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도깨비 팀’ 북한은 세계 최강 이탈리아를 꺾고 8강에 올라 세상을 놀라게 했다. 8강에서 포르투갈에 3-0으로 이기고 있으면서도 ‘공격 또 공격’을 부르짖다가 에우제비우에게 4골을 내주고 3-5로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그들의 무서운 집중력과 목표를 향한 직선의 돌진에 전 세계 축구팬은 환호했다.

44년 만에 다시 월드컵 무대에 나선 북한은 예선 G조에서 포르투갈과 운명의 재회를 하게 됐다. 월드컵 최다 우승팀 브라질, 아프리카 최강으로 꼽히는 코트디부아르도 같은 조다. ‘죽음의 조’에 속한 북한의 성적이 궁금한 만큼 그들의 과거에도 관심이 집중된다.

이재형씨는 북한에도 없는 북한 축구 관련 희귀 자료 50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 그는 “언젠가는 남북한이 동시에 월드컵에 출전할 날이 올 것으로 믿었다. 그래서 북한 관련 자료를 하나하나 모으기 시작했다. 그게 이렇게 일찍 빛을 보게 될 줄 몰랐다”고 말했다. 그는 월드컵 개막 D-100에 맞춰 남아공의 월드컵 개최 도시에서 ‘월드컵 동반진출 기념 남북한 축구자료 전시회’를 열 계획을 갖고 있다.

쇠가죽 축구화, 당시론 수준급
이씨가 사는 서울 성북구 보문동의 아파트. 방 세 칸 중 두 칸에는 전 세계에서 모은 1만여 점의 축구 자료가 빼곡히 들어차 있다. 하나하나가 세월의 더께를 이고 잠들어 있는 보물들이다. 북한 관련 자료를 더 살펴보자.

우선 눈길을 끄는 게 잉글랜드 월드컵 당시 북한과 포르투갈의 8강전 입장권이다. 리버풀의 구디슨 파크(GOODISON PARK LIVERPOOL)라는 장소와 7월 23일 토요일(SATURDAY JULY 23) 날짜가 선명하다. 재미있는 것은 대회 명칭이 ‘월드컵(World Cup)’이 아니라 ‘줄 리메컵(Jules Rimet Cup)’으로 적혀 있는 것이다. 당시는 우승컵의 이름인 ‘줄 리메컵’과 ‘월드컵’이 대회 이름으로 혼용됐음을 알 수 있다. 줄 리메컵은 1970년 브라질이 월드컵 3회 우승을 차지하면서 영구 보유하게 됐고, 현재 우승컵은 피파컵(FIFA Cup)이다.

이탈리아전 결승골의 주인공 박두익이 8강 진출 축하 만찬에서 착용했던 패치도 있다. 영국의 수집가로부터 이 패치를 구입한 이씨는 박두익의 친필 서명이 있는 이 기념물이 왜 영국에 있는지 궁금했다. 그 수집가는 “기념만찬이 끝난 뒤 박두익 선수가 이 패치에 사인을 해서 평소 알고 지내던 영국의 축구 관계자에게 선물로 줬는데 그게 돌고 돌아 나한테까지 왔다”고 설명했다. 박두익은 왜 이 귀한 기념 패치를 남에게 줬을까. ‘N. KOREA’라고 쓰인 국가 명칭에 답이 있다.

당시 북한은 노스 코리아(N. KOREA)라는 명칭을 매우 불쾌하게 생각했다. 자신들의 국제적인 위상을 격하시키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팀이 런던에 도착하자마자 자신들을 ‘N. KOREA’가 아닌 ‘DPRK’로 표기해 달라고 언론에 요청했다. 선수단 버스에 붙은 표기에서 ‘N.’을 지우고 다닐 정도였다. 그런데 영국 정부가 패치를 제작하면서 N. KOREA라고 명기해 버렸다. 박두익이 이 패치를 북한으로 가져갈 수 없었던 건 당연했다.

북한 선수들이 신던 쇠가죽 축구화도 눈길을 끈다. ‘뽕’이라고 불리는 밑창의 스터드가 6개인데 모두 쇠로 만들었다. 발바닥 위쪽 스터드 사이에 가죽 조각을 덧댄 게 보인다. 원로 축구인들은 “저건 북한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디자인”이라며 당시는 북한의 축구화 제조 기술이 남쪽보다 앞섰다고 증언한다. 실제로 북한은 1930년대에 평양의 ‘서선(西鮮)양화점’에서 축구화를 만들기 시작했고, 남한은 해방 후 북쪽에서 내려온 서선양화점 점원 출신 노종영(1997년 작고)씨가 서울에 ‘서경(西京) 체육사’를 차려 축구화를 처음 만들었다.

이재형씨가 자신이 수집한 각종 기념품과 축구공 앞에서 활짝 웃고 있다. 최정동 기자


남한도 축구 사료 무관심하긴 마찬가지
이씨는 “언젠가 통일이 되면 우리가 남북한으로 나뉘어 서로 경쟁하던 시절이 아련한 역사가 될 것이다. 그때의 기록과 자료를 남겨놓는 것이 우리 역사를 이어가는 소중한 작업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고 북한 축구 자료를 수집하게 된 이유를 밝혔다.
북한 관련 용품을 수집하는 과정에서 극적인 순간도 많았다.

그는 2002년 9월 서울에서 열린 남북 통일축구 전날, 친분이 있는 조성환(당시 수원 삼성) 선수에게 ‘미션’을 줬다. “경기가 끝나면 꼭 북한 선수와 유니폼을 바꿔 입어라. 그리고 바꾼 유니폼을 경기장 떠나기 전에 나한테 전달해라.”

조성환 선수는 미션을 충실히 수행했다. 유니폼을 손에 넣은 이씨는 다음 날 아침 북한 선수단이 묵고 있는 호텔로 무작정 찾아갔다. 유니폼에 북한 선수단 사인을 받기 위해서였다. 호텔에는 국가 기관의 경호요원들이 겹겹이 지키고 있었다. 이씨는 한 시간 가까이 통사정을 했다. 마침내 경호담당자 한 명이 “축구 자료 전시회를 연 사람이 아니냐. TV에서 본 적이 있다”며 다리를 놓아줘 선수단 전원의 사인을 받을 수 있었다.

이씨는 한때 국정원의 요시찰 대상이었다. 국정원 요원과 몇 차례 만나기도 했다. 이씨는 “나는 북한 체제를 찬양하는 사람이 절대 아니다. 다만 북한 축구를 좋아하고, 역사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사명감에서 이 일을 한다”고 말했다. 이후 그 요원이 오히려 이씨를 도와주기도 했다고 한다.

사실 ‘역사 자료에 대한 무관심’은 남북한이 다르지 않다. 북한에 없는 자료를 우리가 갖고 있다고 해서 자랑할 일도 못 된다. 나라가 해야 할 일을 개인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씨는 2002년 한·일 월드컵 이탈리아와 16강전에서 안정환이 터뜨린 연장 골든골 공, 스페인과의 8강전에서 홍명보의 마지막 승부차기 공을 모두 갖고 있다. 그가 에콰도르의 바이런 모레노(한국-이탈리아전 주심)와 이집트의 가말 간두르(한국-스페인전 주심)를 직접 찾아가 간곡히 설득한 끝에 겨우 찾아온 것이다. 2002년 월드컵 당시는 흥분과 난리통 속에 공 따위는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대회가 끝난 뒤에도 그 공이 어디 있는지, 찾아올 수는 있는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현재는 과거가 되고, 과거는 역사가 된다. 역사에 스토리를 입히면 훌륭한 문화 콘텐트와 상품이 된다. 스토리를 만드는 실마리가 바로 하찮아 보이는 입장권 한 장, 양말 한 짝이다. 이재형씨의 노력 덕분에 우리는 남북한 축구에 관해서 만큼은 끊임없이 이야깃 거리를 끄집어내고 함께 나눌 수 있다.



이재형씨는
어린 시절 축구를 했지만 집안 형편과 부상 때문에 꿈을 접었다. 그 대신 축구 자료 수집에 몰입해 큰 성과를 이뤘다. 갖고 있는 자료는 전부 자비로 구입한 것이다. 월간축구 베스트일레븐 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으며, 축구 박물관·도서관·자료실 등을 갖춘 복합 축구 문화공간을 만드는 꿈을 갖고 있다.

정영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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