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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깊은 종가의 활인법, 21세기 웰빙과 통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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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호 03면

대통령·국회의장·총리 등이 보낸 조화와 여러 단체와 지인들이 보낸 만장이 안동의료원에 차려진 고인의 분향소를 가득 채우고 있다.

퇴계 선생의 15대 종손 이동은(李東恩) 옹이 23일 서세(逝世)했다. 101세. 명문의 종가를 지켜온 삶도 남다른데, 한 세기 넘게 수를 하신 것은 더욱 흔치 않은 일이다.
25일 오후 도착한 안동 시내 안동의료원에 마련된 빈소는 굴건 제복을 한 상주들과 조문객으로 붐볐다. 빈소 한쪽 벽을 채운 만사(輓詞)들은 고인의 인품을 기리고, 헤어짐의 아쉬움으로 가득했다.

101세 타계, 퇴계 15대 종손 이동은 옹 빈소 현장

고인은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퇴계 종택에서 오랜 세월 살아왔다. 추월한수정은 종택 옆에 지은 정자로 조선 숙종 때 퇴계 문인의 도움으로 지은 건물이다. 현재의 건물은 1920년대 전국 400여 유림과 문중이 비용을 모아 새로 지은 것이다. 안쪽의 현판 ‘도학연원방’은 ‘퇴계의 경사상과 도학이 이곳에서 비롯됐다’는 뜻이다. 안동=최정동 기자

“진세(塵世)에 물들지 아니하고” “맑은 성품이 광풍제월(光風霽月) 같았다” “나이 들수록 더욱 정정하시더니 이제 떠나셨으니 못 다한 정을 가눌 길 없다”는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조문객들은 병원에서 맞고 장례는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종택에서 유교식으로 거행될 예정이라고 한다. 서울에서 왔다고 하니 봉투 하나를 다시 건네주었다. 올라갈 차비로 챙겨준 작은 예였다. 종택의 좁은 집과 마당이 많은 조문객을 접대하기 어려웠겠다 싶었다. 격식도 일각에서는 유림장을 고집했으나, 장례는 가족장으로 치러진다. 집안의 원로급 어른들이 숙의해서 한 제안을 상주이자 다음 종손이 될 근필(根必·78)씨가 받아들인 것이라고 한다. 학자이기보다 종손으로서의 위상에 더 무게를 두었다는 얘기가 흘러나온다. 유림의 규모도 예전 같지 않다는 것, 만장이 몇 개나 들어올지 알 수 없다는 탄식도 한쪽에서 들렸다.

매일 반복한 스트레칭, 활인심방
종손은 맡는 것이 아니라 맡겨진다. 권리보다는 의무와 책임으로 무거운 삶이다. 고인이 된 백세 옹도 신학문을 익히러 종택을 떠나 대구의 명문 중학교로 갔다가, 집안의 호통으로 짐을 싸서 돌아와야 했다고 한다. 뜻을 펴지 못하는 울울과 회한이 없었을까. 빈소에서 상복을 입고 손님을 맞는 이들에게 묻자 다들 뜬금없다는 표정이다. 그 의아함이 종손의 역할을 자연스럽게 해나간 증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겠다. 그 역할을 “사명으로, 소명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한 세기 너머를 장수할 수 있었겠는가.

고 이동은 옹이 지난해 9월 퇴계 종택에서 아들 근필(왼쪽), 손자 치억(오른쪽), 증손자 이석과 자리를 함께했다.

나는 못내 그 장수의 비결이 궁금했다. 주변 분들은 하나같이 ‘체조’부터 거론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배를 천 번 문지르고 한 시간 넘게 도가식 체조와 호흡을 했다는 것이다. 이 수련법은 선조인 퇴계 선생이 오래 의지하고 실천해온 ‘활인심방(活人心方)’에 담겨 있다. 요가처럼 복잡하지 않다. 취, 허, 휴, 스 등의 발성과 함께 숨을 토하고, 치아를 두드리고 머리를 빗으며 손발을 스트레칭하는 단순한 동작법이다.

그리고 매일 한 시간 넘게 하는 산책. 겨울에는 햇빛 좋은 시간에, 그리고 여름에는 해지고 서늘한 시간에 주변을 산책하고 소요하기를 잊지 않았다. 음식은 소식(小食)에 종류를 가리지 않았고, 술은 한 잔을 넘지 않았다고 한다.

백세 옹의 일상은 평범했던 듯하다. 도박과 술 등 잡기를 하지 않았으며 시간에 철저한 성품을 지녔다. 약봉지에 ‘식후 30분’ 하면 어김없이 그대로 지켰다.

낮에는 주로 경서 등 책을 읽고 시를 짓거나, 사람들을 접빈했고, 가끔 나들이가 있었다. 거창한 비즈니스도 없고 휘황한 성공도 없이 산책과 공부, 교제로 한평생을 건강하게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음식과 체조만으로는 장수를 설명하기 어렵다. 태도와 습관, 그리고 가치가 더 중요하게 작용한다. 거동이 불편해지기 전까지는 아침마다 사당에 들러 문안을 드렸고, 원행을 할 때는 두 번 절하고 나섰고, 돌아와서도 먼저 들러 고한 후 짐을 풀었다고 한다.

아무리 나이 적은 사람이라도 인사를 할 때는 맞절을 했다고 한다. 거동이 불편할 때는 자세를 고쳐 잡지 그냥 뻣뻣이 받지 않았다. 손님이 떠날 때는 젊은 사람이라도 방을 나서서 배웅을 했다.

찾아온 손님을 내치지 않고, 언짢은 기색을 비추지 않았다. “종가밥 먹고 나서 당나무 앞이면 벌써 배고프다”는 소리가 이 집안에 우스개처럼 전해 온다. 당나무는 종택에서 여울 건너 200m쯤 될까 하는 거리다. 평소에 손님이 그렇게 많았고 식사 때마다 밥이 모자랐다. 밥을 해 놓고 보면 또 그 사이에 사람이 불어나 있었다. 친척뿐만 아니라 멀리서 찾아온 사람, 그리고 배가 고픈 마을 사람들도 있었다. 접대가 반가(班家)의 법도였고, 과객(過客)은 왕이었던 시절이었다.

백세 옹이 화를 내는 것을 보지 못했다는 사람이 많다. 일을 보던 사람이 소출을 빼돌려도 “사정이 있겠지” 모른 척 눈 감아 주었고, 남이 함부로 소유지에 길을 내도, “그 사람들이 땅을 팔아먹지는 못할 것”이라며 문제 삼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을 처결할 때 미리 혼자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는 얘기도 회자되었다. 작고 큰 일이 있으면 전화를 걸거나 모여서 상의를 한 다음, 적절한 방안을 찾아나갔다고 한다. 재산 등 금전적 문제로 다투거나 문제가 된 적이 없다는 것도 빼놓지 않았다. 부당하게 지출하거나 독단으로 집행했으면 벌써 말이 나고 시끄러웠을 텐데, 이제껏 조용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더욱 백세 옹을 둘러싼 신나고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는지 모른다. 재래의 인사가 왜 “별일 없지?”인지, 이것이 어째서 덕담인지를 조금 알 듯도 했다.

화내지 않고 화합하는 성품
다음 두 가지의 일상은 좀 낯설게 느껴질 듯하다. 백세 옹은 ‘책력’에 따라 출타 등의 날과 시를 정했다고 한다. 당신만이 아니라 주변에도 그렇게 뽑은 시각을 권고했다. 차종손 근필씨도 그 지침을 따랐다. 그렇지 않으면 어르신이 걱정을 할 터여서다. 인척 가운데 받아 적은 시각대로 다녀오다 작은 사고가 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불평을 하니, “더 큰 사고를 막은 줄 알아라”는 말로 일축했다고 한다. 이 습관은 오래된 기(氣)의 사유에 근거를 두고, 주역(周易)이 전하는 길흉화복을 의식한 조언이었을 것이다.

또 하나는 이혼에 대한 관념이다. 유학은 이혼에 호의적이지 않다. 도산서당의 소임은 이혼을 한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지금은 기이하게 들릴 이 지침은 선조의 가르침에 연원이 있다. 손자 안도가 결혼할 때 퇴계 선생은 “부부 사이는 너무 가까우므로 적절한 존중과 공경의 거리 두기”가 필요하다고 당부했다. 금실이 좋지 않은 어느 제자에게는 가만히 편지 한 통을 쥐여주었는데 거기, “자신의 감정만 좇아 인륜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충고 겸 질책이 적혀 있었다. 자신은 행복하지 않은 결혼생활에도 마음을 각박하게 먹지 않고 견뎌온 지 수십 년이라는 쉽지 않은 고백까지 담았다. 마음이 번거롭고 어지러워 너무 괴로워도 그것을 함께한 사람들을 위해 극복해 나가는 것이 인간의 도리라는 것이었다. 더구나 “쫓겨난 아내는 다른 데로 시집갈 길이 없는” 시절 아니냐는 것이다. 스승의 간절한 조언에 제자의 태도가 바뀌었고 부부 금실은 본래를 찾았다. 그 부인은 선생을 위해 3년상을 지냈다고 한다.

대학원보단 어린이 가르치길 원해
위의 습관과 태도들이 장수의 토대였을 것이다. 거기에 ‘자부심과 사회적 인정’을 보태고자 한다. 명가의 종손이라는 이름은 그 자체로 내적 동력과 충만감을 부여한다. 집 밖을 나서도 대부분 문도 집안이므로 대접이 깍듯했을 것이다. 수명을 결정하는 요인 중에 지위 신드롬(status syndrome)이라는 것이 있다. 예를 들면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배우가 그렇지 않은 배우보다 평균 수명이 4살 정도 많다고들 한다. 다만 하나, 이 플러스는 겸양과 자족이 없으면 효과를 발휘하기 어렵다.

백세 옹은 예의염치가 살아 있는 곳, ‘선한 사람(善人)’이 많아지는 세상을 꿈꾸었다. 박약회(博約會)를 설립하고 선비문화수련원과 거경(居敬)대학을 여는 데 정성을 보탠 것도 그 일환이다. 생전에 유교의 가치와 정신을 학습 교육하는 학교를 열고 싶어했는데, 대학원 과정의 이론적 연구보다 초·중등 학생들을 통해 소학(小學)을 가르치고 싶어했다고 한다. 역시 이 공부는 ‘몸을 통한 움직임,’ 그리고 ‘사람들과 교제에서의 적절한 예(禮)’를 통해 구체적·체험적으로 습득된다는 것을 당신이 잘 알고 계셨기 때문일 것이다.

장엄한 장례식 못 보게 돼 아쉬움
종가와 예식은 변화의 물결, 그 한가운데 있었다. 종손의 역할과 책무를 두고 상가의 친지들은 서로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시대에 맞게 과감하게 변해야 한다”는 진보와, “고칠 양이면 차라리 없애는 것이 낫다”는 보수가 부닥치고 있었다.
퇴계 종가의 선택은 변화와 적응을 피해갈 수 없다고 생각한 듯하다. 병원에서 조문객을 받겠다는 것부터 그렇다. 상여 등 기물과 제반 절차도 간소해질 전망이다. 25일 오후 들른 종택의 분위기가 그랬다. 26일 고인을 맞아 27일 발인을 치를 집치고는 조용했다. 상여도 현대식 금속 골조를 이용해 단출하게 준비 중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조금 아쉬웠다. 한국의 풍경을 60년대부터 찍어온 일본의 사진작가 후지모토(藤本巧)가 내게 사진첩 한 권을 준 적이 있다. 눈보라가 휘날리고 있었고, 하얀 소복들이 상여를 앞세우고, 뒤에는 수많은 만장을 이끌고 장지로 떠나는 흑백의 사진 한 장. 그것은 잊힌 기억의 한 장면이었고, 내가 커서 대처로 나간 뒤에는 한 번도 보지 못한 것이었다.

그 장면을 다시 볼지 모른다는 기대가 있었으나 가만히 접기로 한다. 변화가 자연스럽다. 죽은 이를 떠나 보내는 그 장엄한 행렬은 이제 의식으로, 문화적 퍼포먼스로 재연해볼 수는 있겠으나, 현장을 사는 분들에게 요구하기는 너무 가혹하고 비현실적인 시절이 되었다.

그럼에도 유교는 있다. 형식과 의례는 접더라도 나는 그러나 백세 옹의 삶이 보여주고 있는 바, 무형의 가르침과 습관, 그리고 삶의 태도와 심성의 훈련에 더 주목하자고 말한다. 공자가 “내가 예(禮)라고 부르짖은 것이 어찌 악기와 옷차림을 말하는 것이겠느냐”고 했듯이, 예는 마음을 담을 때 의미가 있다. 형식이나 소도구는 다만 이차적이다. 가장 전통적으로 살면서 백 세를 넘어 장수한 노하우, 그 태도와 습관은 지금 현대인들에게도 어필할 것이다. 유교라면 진저리를 내거나 케케묵은 것이라고 코를 막고 외면하는 분들도 장수와 건강, 웰빙의 21세기적 트렌드라면 틀림없이 경청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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