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현대와 명예회장의 퇴직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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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현대 정주영(鄭周永)전 명예회장이 경영에서 물러나면서 24개 계열사에서 2백17억원의 퇴직금을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현대건설 퇴직금만도 월급여 7천4백만원×대표 53년×(가중치)4로 무려 1백57억원에 이른다니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하는 천문학적 규모다.

물론 오너라고 해서 퇴직금을 받지 말라는 법은 없다. 또 이 돈이 최근 산업은행에서 현대건설에 긴급지원된 1천5백억원과는 무관한 것이라니 출처를 문제 삼기도 어렵다.

그러나 그룹은 자금난으로 휘청거리는 판에 오너는 엄청난 돈을 퇴직금으로 챙겨간다는 사실은 개운찮은 뒷맛을 남긴다. 퇴직금 산정 방식도 통상적인 수준으로 보기는 어렵다.

정세영(鄭世永)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과의 결별에서부터 현대그룹 회장직을 둘러싼 몽구(夢九)-몽헌(夢憲)형제간 암투, 공격적인 대북(對北)사업과 일부 계열사 유동성 위기….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현대는 시장의 신뢰를 잃어가고, 국내외 금융기관들이 외면하는 바람에 정부 차원의 지원 결정과 은행의 긴급 자금 수혈 없이는 버티기 어렵다는 얘기가 나오기도 한다.

'구조조정 및 지배구조 개선 계획' 을 내놓았지만 현대의 행태는 여전히 실망감을 감출 수 없게 한다.

鄭전명예회장이 "3부자 동반 퇴진" 을 약속한 지 한달여가 지났지만 실제로 달라진 것은 별로 없다.

국민의 눈에 비친 鄭전명예회장의 영향력은 여전하며, 현대자동차를 둘러싼 형제간 다툼과 가신그룹의 이전투구(泥田鬪狗)는 보는 이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역(逆)계열분리' 라는 편법을 동원, 정부에 정면대응하는 모습은 신뢰감을 더욱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자금 사정이 이처럼 어려운 판에 대북 사업에 드는 엄청난 돈을 어떻게 충당할지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국내외에서 자금을 끌어들이겠다지만 현재의 신인도에 비춰볼 때 성사 가능성은 불투명하다.

이렇게 어려움이 산적해 있고, 鄭전명예회장의 영향력은 여전한데 거액의 퇴직금을 통상적으로 계산하겠다니 현대를 보는 국민의 눈이 곱지 않은 것이다.

만약 일부 보도대로 이 돈이 현대자동차 경영권 장악을 위한 주식매입 자금으로 쓰인다면 더욱 강한 비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현대 패밀리는 시장이 언제까지 인내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만의 하나 현대가 우리 경제에 미치는 영향력, 그리고 대북 사업을 볼모로 국민경제를 좌지우지하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뼈를 깎는 구조조정만이 유일한 살 길이다. 정부도 현대 처리 방침을 분명히 해야 한다. 행여 대북 사업에 대한 부담 때문에 현대 문제를 처리하는 데 영향을 받아서는 안될 것이다.

또 "대우와는 다르다" 고만 할 게 아니라 불안요인이 있다면 제때에 경고하고 바르게 고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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