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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불암이 사는 세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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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중앙 인터뷰 한두 번 해본 취재원도 아닌데 대단히 궁금한 게 있을까요.
편안한 마음으로 그를 만나러 갑니다. 그러나 그의 시선으로 해석한 대답들은
느슨해지려는 세포에 기분 좋은 탄력을 불어넣습니다. 어떻게 기여해야 하나,
일흔의 배우는 여전히 연기와 세상에 대해 생각이 많더군요.

토요일 점심 나절, 지나가는 사람도 차들도 드문드문. 한강변 지척의 호젓한 주택가를 걸었다. 한자리에서 30년은 족히 뿌리를 내렸음직한 낡은 이층집들이 정겹다. 만개한 꽃처럼 한껏 피어오른 감들이 담장 너머로 주렁주렁. 이렇게 취재를 핑계 삼지 않으면 딱히 발길 향할 일 없는 동네. 지난 시대의 오래되고 마모된 풍경이 건네는 위안에 낯빛이 너울거린다. 곁에는 익숙한 얼굴이 동행 중이다. 동네 산책 나온 이웃이 따로 없다. 요기를 해야 할 때라 밥집부터 찾는다. “이 집 설렁탕이 맛있어. 괜찮겠어?” 최불암이라는 배우. 어디서 누구와 함께라도 눈 맞추고 대화하는 모습이 그대로 일상 같다. 설렁탕집 사람들도 단골손님 대하듯 격의 없이, 그러나 공손하게 말을 섞는다. 대배우의 힘은 어쩌면 거기에 있을지도.
저도 모르게 배시시 웃게 되는 드라마를 만났다. 제목도 담백하게 ‘그대 웃어요’(SBS주말 드라마). 호화찬란한 톱스타 캐스팅도 아니고 독한 대사가 오가지도 않지만 ‘사람 사는 게 저런 거지’ 이심전심 마음이 통한다. 압축 성장의 현대사를 관통하며 살아온 아버지가 드라마의 무게 중심이다. 매주 토요일이면 그(강만복 사장)가 운영하는 ‘승리 카센터’를 배경으로 야외 촬영이 진행된다. 아침 일찍, 사고 친 서정길(강석우)을 경찰서에 집어넣는 신을 찍고 이곳으로 넘어왔단다. 얼핏 피곤한 기색을 뒤로하고 설렁탕을 몇 숟가락 후루룩 들이켜고는 카센터로 자리를 옮겼다. 가만 보니 카센터 뒤편 강만복 일가의 살림집은 모형이다. 사진 찍을 만한 곳을 손수 물색하며 늦가을 마당을 거닐던 그가 플라스틱 의자 깊숙이 몸을 밀착시켰다.

‘초록색 추리닝’이 드라마의 트레이드마크가 됐어요. 트레이닝복이 아니라 ‘추리닝’이라고 표현해야 할 것 같은…

일종의 제복이라고 해야겠지. (운전기사 강만복이) 평생 모시던 회장님이 돌아가신 후에 가업을 물려받은 철부지 아들이 부도를 내고 하루아침에 무일푼 신세가 돼. 그 식구들을 거두면서 두 가족이 함께 살게 되는데, 죄다 그 제복을 입혀놨어. 질서와 원칙의 상징이잖아. 강만복이란 아버지는 한데 섞일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두 가족의 화해를 이끌어. 심하면 독재가 되겠지만 자유스런 제복이 아직은 필요한 것 같아. 우리 사회를 봐도 말이야.

아무래도 실제 모습과 캐릭터 사이에 교집합이 있겠지요

내가 캐릭터를 만들기도 하고 캐릭터가 나를 만들기도 하고, 반반쯤 섞인다고 봐야지. 이번엔 연기가 부족하단 생각이 들어. 순발력이 떨어진다고 해야 하나. 나이가 있으니 체력도 예전 같지 않고, 모든 게 조금씩 어눌해져요. 그 인물이 창조적으로 얼른 나오지 않더란 얘기야. 그래서 부대낄 때도 있고. 쉽게 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연기란 게 의식이 배어 나와야 하는데, 큰소리만 치고 있는 것 같아(웃음). 연출하는 이태곤 PD가 ‘그대 그리고 나’ 조연출 출신이야. 그때 캡틴 박, 그 아버지처럼 해달라는 주문이 있었지. 와일드한 아버지잖아. 하지만 앞에서 야단쳐도 등 뒤에선 눈물짓는, 애환과 아픔이 있는 그 이면을 표현해야 하거든. 그런 쓸쓸함이 보여야 하는데….

‘그대 웃어요’에서 말씀하고 싶은 게 있나 봐요

작품을 시작하면서 기대하는 바가 있었지. 안방 아버지들의 생각이 잘 전달되지 않잖아. 훈시 말고, 젊은 사람들과 즐겁고 의미 있게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 우리 시대 가장의 모습이랄까. 다들 일등을 좇고, 돈을 좇지만 물질만능주의에 빠진 풍요로운 삶은 결코 바람직하지도, 행복하지도 않아. 삶의 방향성을 세대 간에 서로 공감하자는 거지. 작가가 영리한 것 같아. 스토리를 끌고 가는 힘이 있어.

다작을 하지 않는데, 배우로서 작품에 매력을 느끼는 지점은 어디쯤일까요

남는 작품을 해야지. 한국인의 인간상, 한국인의 남성상 같은 걸 남기고 싶어. 한국인의 원형은 이렇다는 아이덴티티를 만들어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거든. 요즘 박범신 작가의 『고산자』를 읽고 있어.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 얘기지. 지도는 유유히 내려오는데 김정호의 생애는 아무도 정확하게 모르는, 역사에 숨어 있는 인물이야. 젊었을 때 소설 ‘동의보감’ 쓰신 이은성 선생과 언젠가 ‘대동여지도’를 드라마로 만들게 되면 함께 하자고 했던 약속이 울렁증처럼 자꾸 치받쳐 올라와요. ‘영웅시대’의 정주영도 그렇고 ‘그대 웃어요’의 강만복도 현대사의 상징적인 인물을 표현하고 있는 거지. 삶의 신념이 확실하고 충직한 사람들.

드라마도 조미료 잔뜩 친 듯 들큰하고 자극적인 맛에 길들여지는 것 같아요

막장이란 말은 죽기 아니면 살기란 뜻이거든. 결국은 자본주의의 논리야. 이익을 많이 창출하니까 대접을 받는 거지. 도덕이나 윤리와는 상관없는 일이 되어버렸어. 안방이 무너지면 모든 게 무너지는 거야. 복수, 암투와 같은 비상식적이고 비윤리적인 것들이 질서와 도덕을 허무니 문제지. 그래선 가정의 축이 서질 않아. 드라마는 아이들에게 학교 칠판 같은 역할을 해야 해요. 재밌고 메시지가 있고, 귀감이 될 만한 무엇이 있어야 되는 거야. 드라마 안에서 사회와 관계를 배우고, 가족과 사랑, 성공 등의 가치도 배우게 되니까. 아이들의 미래를 지키려면 엄마들이 안방을 사수해야지. 그런 드라마는 안 보면 돼. TV 하나만 지켜내도 교육이 달라져요. 똑똑한 엄마들이니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해.

한 시간에 기껏 해야 한두 신 찍는, 지루할 만큼 공정 과정이 긴 작업이잖아요

드라마는 팀워크 싸움이야. 시간도 오래 걸리고, 한 번에 50~60명 정도씩 대부대가 움직이니 서로 호흡이 삐끗하면 힘들어져. 스태프들이야 대체로 큰 문제 없지만 배우들끼리 자존심 싸움이라도 벌어지면 전체가 흔들려. 엇비슷한 여배우들 간에 기 싸움이 종종 생기더라고. 내가 드라마 시작하면서 강조한 게 있어. 바로 인화야.

세월이 흐르니 촬영장 풍경도 많이 변하죠. 현장의 밀도랄까요

우리가 필름 세대잖아. 옛날에는 필름 값 아끼려고 한 컷에 승부를 걸었지. 요즘은 보통 서너 번씩 찍는데, 난 예전 습관 때문에 똑같은 거 여러 번 못하겠어. 장단점이 있겠지만 연기적인 완성도는 그때가 더 좋았을 수도 있지. 한 번에 응축된 걸 내보여야 하니까. 배우를 둘러싼 환경들은 여전히 아쉬운 점들이 있어. 카메라와 조명, 음향 같은 것들. 아직 우리나라는 배우 의존도가 높아. 배우더러 다 설명하라는 식이지. 배우는 말을 안 해도 희로애락이 표현돼야 하거든. 음악으로, 컬러로, 앵글로, 조명으로…. 외국의 잘 만들어진 작품들을 보면 처절한 아픔과 고민을 연기하는 배우의 느낌이 그대로 전달되잖아. 꼭 천연색이어야 하나? 상황에 따라서 모노톤으로 갈 수도 있는 거지. 그런 환경적인 조건들이 20% 정도만 개선되면 좋겠어.

젊은 후배들과는 소통이 자연스러운가요

연기 잘하는 후배들을 보면 기특해. 송옥숙이 며느리로 나오는데, 눈에 총기가 반짝반짝하는 게 얼마나 좋아 보이는지 몰라. 강석우도 역할 아주 제대로 만났고, 천호진은 연민이 비치는 정의로운 남자 캐릭터를 천연덕스럽게 소화해. 허윤정은 연기에 대해 지적하는 걸 보니 학교 교수로 성공하겠고. 이민정은 알고 보니 내가 현대예술극단을 운영할 때 우리 연극에 아역으로 출연한 적이 있더라고. 뾰루퉁한 연기를 예쁘게 잘해. 정경호는 내가 그 아버지 정을영 감독(‘엄마가 뿔났다’ 연출) 팬이라 더 유심히 보고 있지. 연기력이 괜찮은 친구야. 얼굴이 참 작지. 이규한이나 이천희나 얼굴들이 어떻게나 작은지, 나도 예전엔 얼굴 작다 소리 들었는데 비할 바가 못돼(웃음). 똑똑한 최정윤은 실물이 더 예쁜 아이야.

말이 나온 김에, 선생님 얼굴엔 몇 점 주실 건가요? 질문이 무례해도 용서하시길…

배우로 살기에 어정쩡해. 더 거칠든가 더 수려하든가. 거울 보면서 “그 얼굴로 무슨 배우야?” 할 때도 있어. 연극하던 시절에 하루는 배우 김순철씨 집에 갔는데 그 친구 아버지가 “뭐 하러 나가냐?” 물으시더라고. “연극하러 갑니다” 대답을 했지. 잠깐 정적이 흐르더니 한마디 툭 던지셨어. “너희들은 거울도 안 보냐?”(웃음)

이병헌씨는 “배우처럼 생겼다”는 말이 자신을 흥분시킨다고 하던데요. 모름지기 배우의 얼굴은 이래야 한다는 조건이 있을까요

임현식이 MBC 1기인데, 질박하고 구수한 한국 사람의 얼굴이잖아. MBC가 안목이 있었던 거지. 배우는 이런저런 사람이 다 있어야 돼. 우린 연극배우로 시작해서 잘생겨야 배우 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 나도 거칠고 투박하게 보이려고 일부러 사포로 얼굴을 문지르고 그랬었지. 70, 80년대 산업화 시대의 인간 군상, 그 시대의 남자가 상징되는 얼굴을 표현하고 싶은 욕심에…. 소싯적 내 우상은 최무룡, 김승호, 최남현 선생 같은 분들이었어. 그 양반들이 명동 거리에 뜨면 사람들이 다 쳐다봤지. 정말 배우같이 생겼거든. 배우의 힘, 아우라가 대단했어. 가장 중요한 건 인생의 깊이를 얼마나 담을 수 있느냐의 문제야. 50억 인구 모두가 다 배우의 얼굴을 하고 있는 셈이지.

요즘엔 기업적 규모로 돈을 벌어들이는 배우들도 제법 생겼어요

예전에 만났던 일본 NHK 프로듀서는 배우란 어느 분야 사람이든지 함께 디스커션(토론)해 보고 싶은 사람, 누구와도 타협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하더군. 남의 영혼과 생명을 나에게 가져올 수 있는 순수함도 있어야 하고, 뭘 하더라도 밉상이면 안 되고, 지루해도 자격 미달이야. 난 배우는 남의 집 안방에 노크 없이 불쑥 들어갈 수 있는 허락받은 손님이라고 생각해요. 때문에 깨끗해야 하고 위선이나 허례허식이 있으면 곤란하지. 배용준이나 이병헌, 장동건 같은 친구들을 보면 거기에 부합되는 면도 있고 모자라는 면도 있을 테지만 나름대로 자기 역할을 잘하고 있는 것 같아. 모든 국민이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시대에 배우로 사는 게 어려울 거야. 부와 인기를 떠나서, 얼마나 외롭고 고독할까. 배용준처럼 신적인 인기를 누리는 배우들은 어떨까. 그래 보지 않아 모르겠지만 말야(웃음). 배용준이 일본 공항에서 경호가 불안한 상황에서도 입국장을 정면 돌파했다거나 공연장에서 다친 팬을 직접 병문안했다는 뉴스를 들으면 인간적인 순수함이 보여. 자기 가슴을 그처럼 진동시켜 주는데 안 좋아할 수 있겠어.

가끔은 나이 드는 게 서글퍼지기도 하겠지요

자꾸 눈이 처져서 고민이야(웃음). 순리대로 늙어가는 거겠지. 세월을 거슬러서 젊어지고 싶진 않아. 내가 설 자리가 젊은이 쪽은 아니니까. 집에 청바지 몇 벌 있지만 젊어지려고 안간힘 쓰는 것 같아 안 입게 되더라고. 올해 칠십이 됐는데, 60세의 즐거움, 65세의 즐거움, 70세의 즐거움이 각각 달라요. 그러니까 살맛이 나는 거야. 여든이 되면 도사처럼 또 뭔가 즐길 거리가 생기지 않겠어. 연기도 마찬가지야. 40대, 50대, 60대, 70대의 연기가 다 다르더란 말이지. 세월에 따라 명분적 의미가 달라지고 연기도 점점 내면으로 향하게 돼.

요즘 사는 즐거움 한 토막 들려주세요

며칠 전에 불암산(서울 노원구) 명예 산주 시비 제막식이 있었어. 내 이름하고 같잖아. 불암(佛岩). 내 본명은 영한이고, 중학교 때 큰아버지가 불암이라는 이름을 하나 더 주셨어.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는데 영한이란 이름이 단명할 운이니 장수하라고 부처 불자에 바위 암자를 붙이셨대. 그 나이에 어울리는 이름이 아니어서 어머니가 가지고만 계셨지. 그러다 연극할 때 동명이인이 있어서 불암이란 이름을 쓰게 됐어. 내겐 그렇게 특별한 이름인데, 나를 불암산 명예 산주로 위촉한다잖아. 지질 문화유산으로 보존 가치가 높은 곳이야. 불암산 보존회 회원 600여 명이 쓰레기도 치우면서 환경 지킴이 역할을 하고 있더군. 그날 시비 제막식 한다고 사람들이 많이 왔어. 고마운 마음을 담아서 자작시(‘불암산이여’)를 낭송했지. 「이름이 너무 커서 어머니도 한번 불러보지 못한 채/ 내가 광대의 길을 들어서 염치없이 사용한 죄스러움의 세월, 영욕의 세월/ 그 웅장함과 은둔을 감히 모른 채 그 그늘에 몸을 붙여 살아왔습니다/ 수천만 대를 거쳐 노원을 안고 지켜온 큰 웅지의 품을 넘보아가며/ 터무니없이 불암산을 빌려 살아왔습니다/ 용서하십시오」 보존회 회장이 행사 끝나고 너무 좋아서 이틀 내리 술을 마셨노라고 아침에 전화가 왔어. 나야 고마운 일이지. 친구들은 산 하나 거저 생겼으니 한턱 쏘라고 야단이야(웃음). 요즘엔 드라마에서 어른의 자리를 보여주는 것도 즐거움이고, 이렇게 사회에 참여하는 것도 즐거움이지.

약주도 종종 하시잖아요. 최근의 술친구는 어떤 분들인가요

요샌 주로 후배들이야. 동년배들은 건강 때문에 잘 못 마시지. 며칠 전에 대학 후배, 국회 있을 때 함께 일하던 친구들이 모여서 한잔했어. 젊은 사람들과 얘기하니 즐겁고 반갑고 그랬지. 술자리에 오래 있진 않아. 딱 1차로 끝내지. 2차 가거나 노래방 가는 일은 거의 없어. 집사람도 기다리고, 다음 날 스케줄도 있으니 몸을 과하게 놀리진 않게 돼. 어쩌다 노래방에 가면 ‘낭만에 대하여’ ‘옥경이’ 같은 노랠 불러. 우리 세대의 정서를 담고 있거든.

세월이 주는 깨달음이 있을 거예요

정신이 건강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해. 물질이 먼저냐 정신이 먼저냐, 긴 얘기가 될 수도 있지만 지금은 정신적으로 고매해져야 할 때야. 좋은 차 타고, 좋은 집 사고, 출세하고, 그런 게 뭐 그리 중요한가. 모두가 잘살진 못해도 평균적인 풍요는 경험했으니 이젠 정신적인 가치를 추구했으면 좋겠어. 좋은 사람들과 인간적으로 사람답게 살아야지. 그 좋은 사람 중에 하나가 최불암이면 난 그 이상 없겠어.

참 어려운 숙제, 사랑의 해답은 찾으셨나요

내년이면 결혼 40주년이야. 사랑도 결국은 인간적으로 돌아가더군. 신기하게 집사람(배우 김민자)이 점점 더 좋아져요. 애정이 승화되는 거지. 연민, 나를 위해 희생한 시간들에 대한 고마움, 주름 하나하나의 역사를 아니까 서로가 서로를 보는 시선이 더 애틋하고 아끼게 돼. 결국은 부부밖에 없어. 애들이 전화도 않고 그러면 서운하지만 어쩌겠어, 나도 젊어 그랬는걸.

사랑도 인스턴트 시대라 옛날의 낭만이 그리워지기도 해요

남자는 자고로 말이 없어야 돼. 그 시절 남자들은 순정을 품으면 여자가 사랑하지 않고는 못 견디게, 기어이 넘어오고 말게 유도를 해요. 그런 낭만이 있었어. 젊었을 때 그레이스 켈리 닮았던 우리 집사람한테 나도 그랬고. 약속 장소에는 보통 10분쯤 늦게 나타나는 거야. 왜 안 오나 초조할 때쯤 바바리 깃 날리며 다방 안으로 들어가요, 아주 바쁜 척하면서(웃음). 걸을 때도 3~4미터 떨어져서 오게 하고, 영화표 살 때도 여자에게 묻지도 않고 박력 있게 내 맘대로 정해 버리지. 봤다고 하면 “또 봐” 한마디면 끝이야. 말 없는 남자의 순정이지.

딸 혼사를 조용히 치르셨던데, 아빠 마음이 젖어들었겠네요

자기들끼리 연애했지. 사위는 컨설턴트고 딸은 대학원에서 공부해. 결혼식 앞두고 시집가는 딸에게 장문의 편지를 썼어. 어렸을 때 보았던 모습부터 자라면서 느껴던 것들, 아내와 며느리로 살아야 할 도리까지 쓰다 보니 한 달 넘게 걸리더라고. 결혼식 끝나고 건네줬는데, 받고는 말이 없어. 아마 말하고 나면 혼자 간직하지 못할 것 같아 속으로 묻어두는 눈치야. 내가 염려한 것들을 가슴에 품고 있는 게 찬찬히 보이지. 최백호가 ‘애비’라는 노래에서 딸 시집보내는 심정을 논바닥 갈라지듯 가슴이 찢어진다고 했는데 그 말이 맞아. 아들 때와는 달랐어.

친손녀도 보셨잖아요. 핏줄은 신기한 거예요

모임에 와서 손자 손녀 자랑하는 친구들이 제일 한심했었어. 그런데 내 손녀가 생기고 보니 나도 똑같이 되더라고(웃음). 예쁜 거야 말로 다 못하지. 손녀는 동포일 뿐이라고 거리 두기를 하려고 해도 할아버지 마음이 어디 그런가. 저 아이에게 정신적으로 무엇을 물려줘야 하나 고민도 하게 되고. 우리 아이들한테도 그렇고, 내 DNA 중에서 대물림하고 싶은 건 예술성이야. 어떤 일을 하든 예술적?인문학적 토양이 있으면 삶이 풍요로워지거든. 다행히 우리 아이들이 그런 면에 좀 강해.

시대의 어른으로서 꼭 이루고 싶은 과업이 있을까요

우리 사회에도 문화적?예술적 DNA가 배양되면 좋겠다는 거지. 한강에 예술섬을 만드는 일에 참여하고 있어. 서울시 한강 르네상스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한강예술섬가꾸기추진위원회가 발족됐지. 문화 전문가 20여 명이 모여 있는데 그 추진위원장을 맡았어. 한강이 아파트만 있지 스토리가 없잖아. 나는 한강을 중심으로 한 그 공간이 우리나라 문화예술의 기능과 정신을 집화하는 터전이 되길 바라지. 뉴욕 링컨 센터에 갔을 때, 물론 시설도 훌륭했지만 그 안의 자료가 대단했어. 눈물 나도록 감동적이야. 그걸 기반으로 모든 공연 예술이 만들어지는 거지. 연기 외에 다른 사명이 있다면 이런 거야. 미래 세대를 위한 나와 우리 세대의 숙제라고 생각해.

인터뷰 끄트머리. 카메라 앞에 서야 할 차례가 왔다. 슛 들어가기 5분 전, 카센터 사무실로 미리 들어간다. 요란한 분장도 없이 거울 한 번 쓰윽 보고는 자리에 앉아 몰입을 준비하는 배우. 무심한 듯 툭툭 던지는 대사에 인생이 실린다. 연기가 성에 차지 않는다는 고백에서 그의 번뇌가 읽히지만, 이토록 배우다운 배우를 어디서 만나겠나.

취재_허윤미 기자 사진_문덕관(studio lam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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