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크리스마스의 기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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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러디스 빅토리’호의 갑판을 가득 메운 피란민들.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1950년 12월 23일 1만4000명을 태우고 흥남부두를 출발, 25일 거제 장승포항에 도착했다. [중앙포토]

그는 해마다 같은 날 생일상을 받았다. 초등학생 때가 돼서야 가족 중 유일하게 그만 양력 생일을 쇤다는 걸 알았다. 크리스마스인 12월 25일. 그의 생일이다. 그가 연유를 묻자 선친(2001년 작고)은 “좋은 날이어서 그렇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곤 그의 출생에 얽힌 사연을 풀어놓았다고 한다. 경남 거제도에서 장승포동물병원을 운영하는 이경필(사진) 원장의 얘기다.

이경필 원장 특별한 60세 생일

12월 23일 역사적 ‘흥남 철수’때 2000명 탈 수 있는 빅토리호에
선장은 피란민 1만4000명 태워 항해 중 새 생명 다섯 태어나

그의 출생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11월 초까지만 해도 유엔군은 호기롭게 국경선을 향해 진격했다. 하지만 중공군이 밀고 내려왔고 11월 영하 30도의 함경도 장진호 주변에서 양측이 충돌했다. 유엔군은 이후 함흥∼흥남으로 물러섰고 다음 달 초 아예 38선 이남으로 철수키로 결정했다. 피란민이 수십만 명에 이르렀다. 당시 37세로 흥남에서 사진관을 운영하 던 그의 부친도 피란을 가기로 결정했다.

그의 부모는 10여 일 기다린 끝에 12월 23일 로프를 타고 한 화물선에 올랐다. 레너드 라루 선장이 모는 ‘메러디스 빅토리’호(7600t)였다. 마지막 피란 배였다. 그 배에 승선한 피란민은 1만4000명이었지만 하선할 때 숫자는 1만4005명이었다. 전원이 생존했을 뿐 아니라 항해 중 다섯 명의 ‘새 생명’이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경필 원장이 마지막 탄생이었다. 순서에 따라 미국 승무원들은 그에게 ‘김치-파이브(5)’란 별칭을 붙였다.

“3일 동안 신이 우리와 함께 항해했다고 믿는다.”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레너드 라루 선장이 1960년에 한 술회다. 그는 “10년 전 크리스마스 때 지구 반대편에서 한 놀랍고 경이로운 항해를 항상 기억할 것”이라고 했다. 실제 그는 그 항해를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고 여겼다.

1950년 12월 23일 오전 11시 흥남을 출항, 이틀 뒤인 25일 낮 12시42분 거제도 장승포 앞바다에 정박할 때까지의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항해 말이다. 그 25일 오전 3∼4시 사이 ‘김치-파이브’인 이경필 원장이 태어났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에 있는 메러디스 빅토리호 모형 앞에 선 이경필 원장. 그의 뒤로 1950년 흥남 철수 당시 메러디스 빅토리호에 로프를 타고 올라가는 피란민의 모습 조각상이 보인다. [고정애 기자]

- 당시 배 안의 상황은 어떠했다고 하나요.

“화물선이었답니다. 거기에 사람들이 엄청 탔으니, 몸을 움직이기조차 어려웠다고 하네요. 갑판 위는 무지하게 추웠고요.”

이 원장의 전언보다 배의 사정은 훨씬 엄혹했다. 애당초 2000~3000명 정도를 태울 수 있을 거라고 여겼던 배라고 한다. 하지만 라루 선장이 “될 수 있는 한 많이 데리고 가겠다”고 결정했다. 공간이란 공간마다 피란민을 밀어 넣었고 선창을 새로 내기도 했다. 승무원들이 “조그만 차에 12명의 거인이 타는 것 같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정도였다고 한다.

결국 13시간40분 걸려 1만4000명을 태웠다고 한다. 피란민들은 배에 올랐지만 옴싹달싹할 수 없는 처지였다. 선원은 라루 선장을 포함, 달랑 48명에 불과했다. 이들이 유일하게 아는 한국어는 ‘빨리빨리’ 정도였다. 배 안엔 인화성이 높은 항공유 300t이 실려 있었고 바다엔 기뢰가 가득했다. 라루 선장이 “이론상으로는 인명의 피해가 엄청날 수 있었다”고 불안해한 까닭이었다. 하지만 단 한 명의 희생도 없이, 오히려 새 생명을 잉태한 항해가 된 셈이었다.

- 출생이 특별했습니다.

“하선을 준비 중이었답니다. 부모님은 ‘좀 더 일찍 태어났으면 더 대우를 받았을 텐데’라고 농담을 하곤 하셨습니다. 그래도 하선하자마자 장승포에 있는 세브란스병원에 저를 입원시키더랍니다. 미역과 모포도 선물받았고요. 어린아이가 있다고 인근 지역에 살도록 해줬답니다.”

- 부친이 북한을 떠나기로 한 이유는 뭔가요.

“우익활동을 하던 차에 ‘로스케’(소련) 사람들이 들어왔는데 사는 게 엉망이었대요. 밤에 도둑질이 끊이질 않고, 못 살겠더랍니다. 그러다 유엔군이 들어왔고…. 할머니가 ‘너는 3대 독자니 일단 피하라’고 강하게 말씀하셨답니다. 아버지가 ‘아내가 만삭이어서 못 내려간다’고 했는데도. 그래도 아버지가 떠난 건 ‘보름 정도면 돌아올 수 있겠지’라고 여기셨던 때문이라네요.”

- 부친께서 북쪽에 노모만 두고 오신 걸 후회하지 않으시던가요.

“아버지의 18번이 ‘고향이 그리워도…’(‘꿈에 본 내 고향’)로 시작하는 노래예요. 자주 부르셨죠. 명절 때마다 할머니 제사를 모셨고요. 이제는 돌아가셨겠죠? 아버지는 그래도 피란 온 것을 후회하진 않으셨습니다. 공산주의가 싫어서, 자유를 찾아오신 거는 말씀 안 해도 자식들이 다 압니다.”

이 원장은 경상대 수의학과를 졸업한 뒤 73년부터 3년간 철원에서 ROTC 장교로 군대생활을 했다. 제2 땅굴을 찾는 작업에 참여했다고 한다. 그의 아들은 공사 출신의 공군 조종사(대위)로 근무 중이다. 이 원장은 “누가 얘기 안 하지만 집안 분위기가 있지 않았겠느냐”고 말했다. 부친은 2001년 “거제 사람들의 도움을 정말 많이 받았다. 잘해주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1950년 12월 24일 유엔군이 흥남 철수작전을 완료한 뒤 부두를 폭파시키고 있다. [중앙포토]

거제=고정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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