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러디스 빅토리’호의 갑판을 가득 메운 피란민들.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1950년 12월 23일 1만4000명을 태우고 흥남부두를 출발, 25일 거제 장승포항에 도착했다. [중앙포토]
이경필 원장 특별한 60세 생일
12월 23일 역사적 ‘흥남 철수’때 2000명 탈 수 있는 빅토리호에
선장은 피란민 1만4000명 태워 항해 중 새 생명 다섯 태어나
그의 부모는 10여 일 기다린 끝에 12월 23일 로프를 타고 한 화물선에 올랐다. 레너드 라루 선장이 모는 ‘메러디스 빅토리’호(7600t)였다. 마지막 피란 배였다. 그 배에 승선한 피란민은 1만4000명이었지만 하선할 때 숫자는 1만4005명이었다. 전원이 생존했을 뿐 아니라 항해 중 다섯 명의 ‘새 생명’이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경필 원장이 마지막 탄생이었다. 순서에 따라 미국 승무원들은 그에게 ‘김치-파이브(5)’란 별칭을 붙였다.
“3일 동안 신이 우리와 함께 항해했다고 믿는다.”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레너드 라루 선장이 1960년에 한 술회다. 그는 “10년 전 크리스마스 때 지구 반대편에서 한 놀랍고 경이로운 항해를 항상 기억할 것”이라고 했다. 실제 그는 그 항해를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고 여겼다.
1950년 12월 23일 오전 11시 흥남을 출항, 이틀 뒤인 25일 낮 12시42분 거제도 장승포 앞바다에 정박할 때까지의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항해 말이다. 그 25일 오전 3∼4시 사이 ‘김치-파이브’인 이경필 원장이 태어났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에 있는 메러디스 빅토리호 모형 앞에 선 이경필 원장. 그의 뒤로 1950년 흥남 철수 당시 메러디스 빅토리호에 로프를 타고 올라가는 피란민의 모습 조각상이 보인다. [고정애 기자]
“화물선이었답니다. 거기에 사람들이 엄청 탔으니, 몸을 움직이기조차 어려웠다고 하네요. 갑판 위는 무지하게 추웠고요.”
이 원장의 전언보다 배의 사정은 훨씬 엄혹했다. 애당초 2000~3000명 정도를 태울 수 있을 거라고 여겼던 배라고 한다. 하지만 라루 선장이 “될 수 있는 한 많이 데리고 가겠다”고 결정했다. 공간이란 공간마다 피란민을 밀어 넣었고 선창을 새로 내기도 했다. 승무원들이 “조그만 차에 12명의 거인이 타는 것 같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정도였다고 한다.
결국 13시간40분 걸려 1만4000명을 태웠다고 한다. 피란민들은 배에 올랐지만 옴싹달싹할 수 없는 처지였다. 선원은 라루 선장을 포함, 달랑 48명에 불과했다. 이들이 유일하게 아는 한국어는 ‘빨리빨리’ 정도였다. 배 안엔 인화성이 높은 항공유 300t이 실려 있었고 바다엔 기뢰가 가득했다. 라루 선장이 “이론상으로는 인명의 피해가 엄청날 수 있었다”고 불안해한 까닭이었다. 하지만 단 한 명의 희생도 없이, 오히려 새 생명을 잉태한 항해가 된 셈이었다.
- 출생이 특별했습니다.
“하선을 준비 중이었답니다. 부모님은 ‘좀 더 일찍 태어났으면 더 대우를 받았을 텐데’라고 농담을 하곤 하셨습니다. 그래도 하선하자마자 장승포에 있는 세브란스병원에 저를 입원시키더랍니다. 미역과 모포도 선물받았고요. 어린아이가 있다고 인근 지역에 살도록 해줬답니다.”
- 부친이 북한을 떠나기로 한 이유는 뭔가요.
“우익활동을 하던 차에 ‘로스케’(소련) 사람들이 들어왔는데 사는 게 엉망이었대요. 밤에 도둑질이 끊이질 않고, 못 살겠더랍니다. 그러다 유엔군이 들어왔고…. 할머니가 ‘너는 3대 독자니 일단 피하라’고 강하게 말씀하셨답니다. 아버지가 ‘아내가 만삭이어서 못 내려간다’고 했는데도. 그래도 아버지가 떠난 건 ‘보름 정도면 돌아올 수 있겠지’라고 여기셨던 때문이라네요.”
- 부친께서 북쪽에 노모만 두고 오신 걸 후회하지 않으시던가요.
“아버지의 18번이 ‘고향이 그리워도…’(‘꿈에 본 내 고향’)로 시작하는 노래예요. 자주 부르셨죠. 명절 때마다 할머니 제사를 모셨고요. 이제는 돌아가셨겠죠? 아버지는 그래도 피란 온 것을 후회하진 않으셨습니다. 공산주의가 싫어서, 자유를 찾아오신 거는 말씀 안 해도 자식들이 다 압니다.”
이 원장은 경상대 수의학과를 졸업한 뒤 73년부터 3년간 철원에서 ROTC 장교로 군대생활을 했다. 제2 땅굴을 찾는 작업에 참여했다고 한다. 그의 아들은 공사 출신의 공군 조종사(대위)로 근무 중이다. 이 원장은 “누가 얘기 안 하지만 집안 분위기가 있지 않았겠느냐”고 말했다. 부친은 2001년 “거제 사람들의 도움을 정말 많이 받았다. 잘해주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1950년 12월 24일 유엔군이 흥남 철수작전을 완료한 뒤 부두를 폭파시키고 있다. [중앙포토]
거제=고정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