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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영이가 살아있어 기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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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진국
김진국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나영이의 근황을 보도한 어제 자 중앙일보를 보면 가슴이 찡하다. 나영이가 웃음을 되찾았다고 한다. 친구를 집으로 데려오기도 하고, 성적도 사건 전으로 회복했단다. 기특한 것은 나영이의 마음 씀씀이다. “제가 아파 봤기 때문에 아픈 친구들의 마음을 더 잘 알고 아프지 않게 치료해줄 수 있을 것 같아요.”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나영이는 의사가 되어 친구들을 돕겠다고 했다.

사지가 멀쩡한 어른들이 아이들을 괴롭히고, 이기심으로 똘똘 뭉쳐 온갖 못된 짓을 다 저지르는 판에 자신의 아픔을 사랑으로 승화시킨 나영이가 너무 예쁘다. 그런 나영이가 살아있다는 사실이 너무 기쁘다. 흔히 쉬운 말로 “죽기보다 못하다”는 말을 한다. 그러나 그건 어려운 처지를 강조하는 수사 에 불과하다. 나는 나영이가 살아있기에 그런 예쁜 마음을 키울 수 있다고 믿는다. 어떤 불행도 생명의 가치와 저울질할 수 없다.

올해는 유난히 아동 성폭행이 많았다. 조두순뿐 아니다. 초등학생을 네 차례나 성추행(性醜行)해 복역한 뒤 출소 5개월 만에 또 여중생을 성추행한 영어 강사, 10세 이하의 여자아이를 상습 성추행한 학습지 교사, 정신질환 초등학생을 성폭행한 50대, 자신이 돌보던 여자아이들을 상습 성폭행한 보육원 원장…. 공지영의 『도가니』는 소설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현실이다.

그러니 아동 성범죄를 가중(加重) 처벌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는 것은 당연하다. 정치권은 이에 맞춰 여러 가지 대책들을 내놨다. 그중에서도 주목되는 것은 이달 초 정부와 한나라당이 내놓은 아동성범죄 대책이다. 아동 성폭력에 대해 현행 유기징역 상한인 15년을 30년으로 늘리고, 가중 처벌 때는 25년을 50년으로 올린다는 것이다.

법이 민심을 외면할 수는 없다. 그러나 여론이 들끓는다고 감정에 휘둘리다 보면 포퓰리즘에 빠질 수 있다. 여론을 따라 들쑥날쑥 법체계를 흔들어 놓으면 여론이 가라앉은 뒤 죽은 법이 되기 십상이다.

최근 입법 사례를 보면 전체의 틀을 엉클어놓는 경우가 잦다. 지난해 12월과 올 4월 목적세 폐지를 전제로 개별소비세를 인상하는 세율 조정안을 통과시키면서 교육세와 농특세 폐지안은 그대로 두는 실수를 저질렀다고 한다(본지 12월 15일자 5면). 이렇게 되면 세율이 뒤죽박죽 엉망이 된다. 이 때문에 목적세 폐지를 사실상 포기하고 개별소비세법과 관세법을 원상회복한단다. 이건 포퓰리즘이라고 할 수도 없다. 정신 빠진 입법이다. 농성과 몸싸움만 벌이다 날치기로 법안을 처리하는 이런 국회가 전체적인 법률 체계를 제대로 관리하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운지도 모른다.

하지만 형법은 중요한 기본법이다. 철학적인 기초 위에 견고하게 쌓아나가야 한다. ‘폭력행위 특별법’ ‘경제범죄 특별법’ ‘강력범죄 특별법’에 ‘성범죄 특별법’ 등 특별법을 양산해왔다. 물론 시대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불가피한 경우도 있지만 예외가 많으면 보편성과 형평성이 무너지고, 전체 법체계가 위협받을 수밖에 없다.

다행히 형법 자체의 유기형 상한(형법 제42조)도 상향조정하는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 조항이 만들어진 1953년 무렵 평균수명은 50세 정도(57년 52.4세)이던 것이 2007년 기대수명이 79.4세로 늘어났으니 당연한 조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전체 양형의 틀이 정리되는 것은 아니다. 현행 형법상 살인은 ‘사형, 무기(無期) 또는 5년 이상의 형’(제250조)에 처하도록 돼 있다. 사실상 사형이 집행되지 않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무기가 최고형이다. 무기형을 감형하면 15년이다. 최근 판결 경향을 보아도 2명 이상을 죽이지 않은 한 15년 형에 그친다.

그런데 현재 국회에 제출돼 있는 ‘성폭력범죄 처벌법 개정안’은 아동에 대해 성행위, 또는 유사 성행위를 한 경우 ‘7년 이상의 형’에 처하도록 해 놓았다. 하한으로만 보면 ‘5년 이상의 형’인 살인보다 더 무거운 죄인 셈이다. 50년 형까지 가능하도록 한다는 취지다. 한 판사는 “성폭행을 감추기 위해 살인을 하도록 만들면 안 된다”고 우려했다. 나는 나영이가 그래도 살아있는 게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여론에 영합한 땜질식 입법보다 형법 체계 전반을 다시 손질하는 게 옳은 이유다.

김진국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