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커버 스토리] 전문경영인들 워크아웃사 가보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3면

"옛 오너(사주)의 그늘을 벗기가 힘듭니다. 기존 조직의 저항을 뿌리치며 의사를 결정하기가 어렵습니다. "

"기업경영은 본질적으로 은행경영과 다릅니다. 지금은 손해보더라도 앞날을 보고 밀어붙여야 하는데 채권단이 움직이지 않아요. "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이 진행 중인 기업의 전문경영인들은 고충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뿌리 깊은 오너 조직과 자금줄을 쥐고 있는 채권단의 틈에 끼여 경영능력을 발휘하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전문경영인들은 워크아웃 제도가 본래 취지를 살리려면 ▶워크아웃 계획에 대한 신축적인 수정이 가능하고▶기존 임직원이 전문경영인을 믿도록 하고▶조직관리.판매는 기존 임원이, 재무.경리 등은 전문경영인이 맡는 2인 대표체제 도입▶기업가치를 높여 3자매각이 가능하도록 채권단.오너의 인식변화 등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 경영하기 어렵다〓전문경영인들은 취임하자마자 기존 조직의 저항과 보수적인 경영에 익숙한 채권단의 경직된 사고에 직면한다고 강조했다.

A씨는 "수십년을 경영해온 오너의 그늘이 무섭다" 면서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 운전기사 한명 없이 혼자 왔는데도 기업문화에 적응하는 데 몇달 걸렸다" 고 말했다.

그는 "주요 안건은 부문별 본부장과 반드시 상의해 결정한다" 면서 "사재출연 등을 한 옛 사주를 무시할 수가 없다" 고 말했다.

B씨는 "처음에 성급하게 많은 것을 바꾸려들다 충돌도 적지 않았다" 면서 "임직원들이 등을 돌릴까봐 서서히 의식개혁 작업을 벌였다" 고 말했다.

그는 "많은 이익을 내고 이른 시일 안에 워크아웃을 졸업하려면 신속하고 과감하게 공격적인 투자를 하거나 새로운 구상을 해야 하는데 워크아웃 상태라 어렵다" 고 말했다.

C씨는 "시장 상황은 급변하는데 채권단은 목표 달성에만 급급하고 있다" 면서 "자금을 지원받으려면 채권 금융기관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고 절차가 복잡해 몇달씩 걸리고, 결국 경쟁업체에 뒤진다" 고 말했다.

D씨는 자금을 집행할 수 있는 재량권이 거의 없어 조직을 장악하기 어렵다고 토로했다. 그는 "회사를 위해 큰일을 한 직원에게 경제적으로 포상할 수 없어 아쉽다" 면서 "사업상 접대비가 필요한 데도 쓸 자금이 없어 손발이 묶인 상태에서 경쟁하는 꼴" 이라고 말했다.

◇ 개선방안 찾아야〓전문경영인들은 워크아웃 기업이 정상화로 가는 길은 멀고 험하다고 입을 모았다. 일부 빚을 탕감 또는 출자전환 받고 이자를 조금 싸게 해주지만, 기존 부채가 많아 회생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E씨는 "워크아웃이란 은행이 부채의 출자전환을 통해 부채가 많은 기업을 인수.합병(M&A)한 것" 이라며 "그 종결을 위해서는 서구식의 2차 M&A가 필요하다" 고 강조했다.

그는 "보수적인 은행은 모험을 꺼리고 오너는 소유권을 잃는 매각을 싫어한다는 게 걸림돌" 이라며 "워크아웃이 성공하려면 먼저 채권단과 오너가 변해야 한다" 고 말했다.

C씨는 "시장 변화에 따라 워크아웃 계획을 신축적으로 수정할 수 있도록 채권단이 유연해져야 하며 '돈 되는 사업' 에 대한 신규투자는 확실히 밀어주어야 한다" 고 말했다.

A씨는 전문경영인이 모든 업무를 총괄하기보다 경험이 필요한 관리와 판매.수주 등은 기존 임원진이 맡고 채권단과의 의견조정 등 재무.경리 업무를 영입 경영인이 책임지는 '쌍두 경영체제' 가 효과적이라고 제안했다.

실제로 삼표산업의 경우 오너인 정도원 회장과 전문경영인인 김호 대표가 관리와 영업을 나눠 맡고 있다.

◇ 워크아웃 기업의 명암〓이달 들어 대우는 채권단으로부터 3천7백억원, 쌍용자동차는 1천3백억원의 긴급자금을 지원받았다.

생산차질에 따른 일시적인 자금난을 해소하기 위해 쌍용차는 차입금에 대해 연리 2~4%의 이자특혜와 4천억원대의 자금 지원을 받았는데도 회생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전문경영인(고병우 회장)의 정치자금 살포 의혹으로 도덕적 비난을 받았던 동아건설은 최근 채무 재조정을 했으며 전문경영인을 공개모집 중이다.

일부 대규모 워크아웃 기업이 난항을 겪고 있는 데 비해 중견기업들은 꾸준한 자구노력으로 회생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

대구백화점은 창업주(구정모)가 사퇴한 뒤 사재(45억원)를 출연했고 임직원이 급여삭감 등 고통을 분담한 결과 워크아웃 1년6개월 만인 지난 23일 졸업했다.

지난해 3월 워크아웃에 들어간 영창악기도 자산 조기매각 등에 힘입어 성공적으로 워크아웃이 진행 중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대구지역 건설업체인 서한은 자구계획 이행률이 81%다.

아남반도체는 공장과 계열사 매각, 반도체 경기 호황으로 영업실적이 나아져 다음달 워크아웃에서 졸업할 예정이다.

김동섭.홍승일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