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진배의 유럽통신] 연말 대목에 떨이 신세 ‘샴페인의 굴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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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현지시간)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의 프린세스 거리에서 한 여성이 세일 표시가 나붙은 상점을 지나가고 있다.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에 따르면 소비심리를 나타내는 12월 소비자기대지수는 지난해 7월 이후 처음으로 두 달 연속 하락했다. [에든버러 로이터=연합뉴스]

프랑스 파리의 와인숍 ‘니콜라’는 이달 초부터 모든 매장에 ‘샴페인 20% 할인 판매’라는 플래카드를 내걸었다. 이달 초 이웃 나라인 영국 런던에 가보니 그곳 역시 수퍼마켓에서 샴페인을 20∼30% 싸게 내놓고 있었다.

샴페인은 프랑스와 영국 등 유럽인의 파티에 오르는 고급술이다. 보통 와인보다 비싼 편이어서 크리스마스 파티 때 주로 마신다. 이런 이유로 샴페인 판매상들에게 12월은 대목이지만 경기가 나빠 샴페인이 팔리지 않자 고육책으로 할인행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파리와 런던의 수퍼마켓 카르푸와 프랑프리 등에서는 최근 10유로(약 1만7000원) 이하의 싼 가격에 샴페인을 대량으로 팔고 있다. 이 같은 ‘샴페인의 굴욕’ 진원지는 런던이다. 영국은 전통적으로 미국과 함께 샴페인 최대 소비국이다. 그 중심은 런던의 금융회사가 몰려 있는 시티지구다. 이곳에서는 연말에 최고급 샴페인을 마시며 흥청망청 파티를 하는 것으로 유명하지만 올해는 딴판이다. 금융위기 여파로 시티에 대규모 구조조정이 이뤄지면서 찬바람이 분다. 스코틀랜드 왕립은행은 사내 크리스마스 파티 비용을 대폭 줄였다. 일인당 10파운드(약 1만9000원) 정도다. 예산에 맞추려다 보니 주종도 샴페인에서 맥주로 바꿨다.

이처럼 최대 소비처인 시티가 얼어붙으면서 프랑스산 샴페인의 수출이 크게 줄었다. 내수도 시원치 않아 재고만 쌓여가자 프랑스 샴페인 업자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유례없는 대목 세일에 나선 것이다.

영국은 일반 기업과 개인들도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다. 혼다자동차 영국법인 등 몇몇 대기업은 창사 이후 처음으로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템스강에서 유람선을 빌려 여는 대규모 파티도 지난해 25건에서 5건으로 줄었다. 그나마 파티 메뉴도 양고기에서 상대적으로 싼 닭고기로 바뀌었다. 최근 런던의 직장인 설문조사에 따르면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겠다’고 답한 사람은 열 명 중 네 명이 채 안 됐다. 뮤지컬 등의 연말 공연 예약도 지난해보다 20% 줄었다. 유럽에서 가장 화려한 크리스마스를 즐기던 런던이 올해는 잔뜩 움츠러든 모습이다.

전진배 파리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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