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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정상회담]'6.14서명' 실천만 남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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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평양에서 남북 두 정상이 연출하는 극적인 장면들이 한반도는 물론 세계를 놀라게 하고 있다.

14일의 합의문 서명은 그 절정. 가히 '신(新)남북시대' 가 열리는 순간이다.

과연 어떤 시대일까. 전쟁의 먹구름은 영원히 걷히고 평화의 새 바람만 불어올까. 전문가의 깊은 분석과 전망으로 시대의 기상(氣象)을 잰다. 편집자

남북한 정상은 14일 마라톤회담에서 합의를 도출함으로써 남북관계의 역사적 전환점을 가져왔다.

예상보다 시작이 좋았고 진행도 구체적이어서 처음부터 기대를 낳게 하는 역정이었다.

극적인 반전을 거듭해온 한반도의 곡절 많은 운명속에 살아온 우리여서인지 며칠 지나면 무덤덤해지기 일쑤지만 13일과 14일 남북한 최고지도자가 연출한 장면 하나하나는 놀라움 자체였다.

◇ 숨가쁜 상황〓두 정상은 13일 공항영접 행사를 마치고 리무진에 동승해 55분간 대화를 했고 이어 백화원 영빈관에서 환담을 나눴다.

그뒤 공개된 내용을 보면 구체적인 알맹이 있는 대화는 없었다. 그러나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이 김대중(金大中)대통령에게 남북의 지도자가 만났으니 뭔가 '대답' 을 내놓아야 한다는 얘기를 건넴으로써 합의에 이를 일말의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또 이날 저녁 김영남(金永南)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도 만찬사에서 '통일은 언제 이룩되겠는지' 를 7천만 겨레가 절박하게 묻고 있다면서 이제는 이에 '대답' 해야 한다고 말했다.

북측의 화법에 익숙한 전문가들 조차 이에 크게 주목하지는 않았지만 북측은 이미 합의에 이르는 노정을 면밀히 계산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상회담을 지켜보는 우리 국민 대다수가 투명성 높고 예측 가능한 회담을 기대하고 있었던 점을 북측도 고려하고 있었던 것같다.

金위원장으로선 영접의전을 비롯한 일련의 행사에서 체제안정과 지도자.주민간의 일심단결을 충분히 과시했으니 남은 시간 회담에 집중한 것이다.

그런데 14일 오전에 진행된 金대통령과 김영남 상임위원장을 비롯해 양측 고위관계자들의 공식면담 행사는 회담전문가들조차도 속을 만한 '역사적 트릭' 이었다.

이 자리는 남북 현안을 전반적으로 다루면서 상견례를 하는 분위기가 짙어 단독회담이 과연 열리는 것인지, 실질토의가 가능할는지 등에 의문을 주었기 때문이다.

또 金대통령의 표정도 다소 무거워 보여 뭔가 삐걱거리는 게 아닌가 하는 관측을 낳았다.

이 상황에서 실은 공식면담에 김용순 대남비서와 송호경 아태평화위 부위원장이 불참했다는 것이 중요한 포인트였다. 두사람이 단독정상회담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 합의현장〓오후 3시 두 정상과 최소한의 배석자가 참가한 단독정상회담이 열림으로써 실질토의에 들어갔다. 북측에서는 김용순 비서 혼자 배석해 단출했다.

우리측의 경우 金대통령 바로 곁에는 '햇볕정책의 설계사' 임동원 대통령특별보좌역과 황원탁 외교안보수석, 이기호 경제수석이 배석했다.

두 정상의 회담은 긴박성 속에서 속도감 있게 진전됐다. 두 정상은 국내외에 쏠린 시선을 의식한 듯 시종 진지한 태도로 합의에 이르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金위원장은 예상치 못한 적극자세로 나와 합의에 이르는데 극적으로 성공했다. 그는 미리 줄거리가 짐작되는 드라마는 시청자의 흥미를 끌기 어렵다는 것을 감안해 극적인 상황전개를 준비한 것으로 보인다. 단독회담에 앞서 가진 환담에서 거침없이 말을 쏟아놓아 파격을 예고하기도 했다.

당초 북한이 통상적인 남북대화나 북.미협상에서 보여온 '일괄타결' 에 집착을 보일 것이란 관측도 있었지만 우리측 요구를 수용할 분위기가 감돌았던 것이다.

회담에서 金위원장은 두가지를 강조한 것으로 유추된다. 첫째, 경제적 실리면에서 경제적으로 무엇을, 어느 정도의 규모로 지원해줄 수 있는지를 물었을 것이다.

둘째, 명분 내지 원칙면에서의 요구가 제시됐을 것이다. 예를 들어 민족대단결이나 자주의 원칙에 따라 국가보안법 철폐.주한미군 철수, 더 나아가 통일방안에 이르기까지 여러가지를 언급했을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합의에 이른 것으로 보아 이같은 주장을 전면에 내걸어 회담에 장애를 조성한 것 같지는 않다.

◇ 합의 이면〓두 정상은 제로섬 게임에서 벗어나 윈-윈게임을 하자는 결심을 갖고 만났기 때문에 처음부터 접점찾기에 노력한 흔적이 있다.

이 역사적 드라마의 세세한 부분이 다 드러나지는 않겠지만 합의 도출의 출발점은 아무래도 '리무진 동승' 인 것 같다.

그러나 모든 역사에는 이면(裏面)이 있듯이 이번 합의에도 '숨은 그림' 이 흥미를 끌지 않을 수 없다.

정상회담 개최합의에 이른 비공개 접촉 라인이 이번까지 무대 뒤편에서 실무작업을 한 흔적이 역력하다.

임동원-김용순을 축으로 한 실무라인이 처음부터 끝까지 일을 추진, 성과에 도달한 것이다. 사전 정지작업이 없었다면 두 정상이 이처럼 전격적인 합의에 도달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로드맵 제시〓합의서의 골격은 첫째, 화해.통일 지향 둘째, 한반도의 긴장완화와 평화정착 셋째, 이산가족 상봉 넷째, 경제.사회.문화 등 다방면의 교류협력 등으로 짜여져 있으며 이를 위한 구체적인 조치를 마련해나갈 것을 약속하고 있다. 남북관계의 새로운 로드맵이 만들어진 것이다.

합의서는 지난 1992년 2월에 발효된 남북기본합의서 내용을 전반적으로 포괄하고 있지만 구체적이고 세세한 합의를 담은 것은 아니다.

따라서 앞으로 구체적인 실무회담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기본합의서를 참고해 구체안을 다시 만들어 나가게 될 것이다.

정상회담과 만찬 분위기로 보아 金위원장의 서울방문이나 정상간의 핫라인 설치, 서울.평양 연락대표부 설치 등의 전망도 밝아졌다.

金위원장은 이번 회담과 합의를 계기로 실용주의적이고 개방적인 지도자란 인식을 국제사회에 심어주는 극적인 효과를 거두었다.

그가 서울을 방문하거나 국제무대에 등장할 가능성이 한층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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