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력 잃은 미국 증시 떠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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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1990년대 우량 기업의 자격증으로 통했던 미국 증시 상장이 거꾸로 외국 기업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

최근 미국 증시에 상장된 많은 외국 기업이 미국 증시 탈출을 심각하게 고려 중이라고 아시안월스트리트저널이 21일 보도했다.

내년부터 미국 증시에 상장된 1300여개 외국 기업에도 사베인스-옥슬리 법안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이 법에 맞추려면 자체적인 내부 감사 시스템을 새로 마련하고, 회계처리 기준과 방식도 바꿔야 한다. 회계 비용이 크게 늘어나 가뜩이나 불황으로 적자에 시달리는 기업들로선 감당하기 어렵다.

외국 기업들은 이미 엔론 등의 대형 회계부정 사건이 2001년 말부터 잇따라 터진 후 지금까지 까다로운 회계기준과 공시요건을 맞춰야 했고, 이에 따른 비용도 만만찮게 짊어져 왔다.

이에 따라 일부 기업은 상장 폐지를 추진하고 있다. 독일의 소프트웨어 업체인 인터숍 커뮤니케이션은 전체 발행주식의 0.8%만을 뉴욕증권거래소에 상장했음에도 새 법에 따라 회계 비용 등으로 연간 50만유로(약 70억원)를 더 써야 한다며 미 증시 상장 폐지를 결정했다. 생명공학 업체인 라이온 바이오사이언스는 내부통제 비용이 불어나자 나스닥 등록 폐지를 저울질하고 있다.

지난 5월 브로드게이트 컨설턴트와 밸류 얼라이언스.뉴욕은행이 공동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미국 증시에 상장돼 있는 많은 외국 기업은 "사베인스-옥슬리 법안이 가혹하다"며 "미국 증시 상장 폐지를 고려 중"이라고 답변했다.

그러나 미국 증시 상장 폐지에는 적어도 8개월이 걸린다. 영국경제인연합회 등 유럽 기업 단체들은 미국 정부에 상장 폐지 기준을 완화해 달라고 요구했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는 "외국 기업들의 상장 폐지 기준을 완화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으나 아직 구체적인 대안을 내놓지 않고 있다.

나스닥에는 올해 외국 기업 13개가 새로 등록했으나 10개 기업은 등록을 취소했다. 뉴욕증권거래소에 상장한 외국 기업들은 8개로 지난해의 절반에 그쳤다. 2개 기업은 자발적으로 상장을 폐지했다.

허귀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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